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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밤의 피서

아파트에는 핀란드식 사우나와 연결된 실내 수영장이 있다. 오전 8시, 오후 2시, 오후 4시 다양하게 방문해봤지만 누구도 마주치지 않은 걸 보면 이 아파트 사람들은 수영장에 크게 관심이 없다. 버스에 2- 30분 느긋하게 앉아있으면 금빛 모래사장에 도착하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나는 그 시간이 아까워 아무도 없는 실내 수영장으로 간다.

수영장은 고요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헤엄을 치지만 물소리가 공간을 웅웅 울린다. 풀장 바닥은 짙은 남색 타일, 바깥 바닥은 희끄무레한 하늘색 타일이다. 가장 압권은 벽화인데, 국적을 알 수 없는 작풍의 빽빽한 나무 숲 그림이 풀장 오른쪽 벽을 따라 펼쳐져있다. 짙은 녹음이라기엔 어딘가 음습한 구석이 있어 나는 10초 이상 잠영하지 않는다. 그 이상 있으면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숲 속 수채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지겨워지면 마지막 힘을 다해 뭍으로 나와 물기를 닦아낸다. 정원을 지나 A동으로 향하는 복도의 문을 연다. 어찌된 일인지 열쇠는 10번 중 6번이 말썽이다. 복실복실한 복도 카펫 위로 물자국이 조금씩 남는다. 701호 앞, 몸을 기대 철문을 힘껏 열면 역시 조용하다. 등 뒤로 묵직하게 문이 닫힌다. 목욕바구니를 챙겨 샤워부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제모를 한다. 몸이 젖기 전 제모하는 것이 털이 더 잘 밀려서 좋은데, 항상 샴푸를 할 때쯤에 그 사실이 떠오른다. 물론 오늘은 이미 수영을 한 몸이니 예외다.

뽀송해진 몸으로 눅눅한 침대에 눕는다. 건조기를 아무리 돌려도 빨래가 버석거리지 않는 요즘이다. 모로 누워 구글맵에 저장해뒀던 곳들을 들여다본다. 오후 4시 40분. 어딜 가긴 늦었다. 잠깐 선잠에 들었더니 6시 20분이 됐다. 잠깐 침대맡에 걸터앉아 있다가 잡히는 옷을 주워 입었다.

아직 날이 뜨겁다. 선글라스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손차양을 한다. 광장에선 토요일마다 라틴 댄스 나잇이 열린다. 보통 7시쯤 끝나는데, 12월에는 이때도 해가 중천이다. 검정 나시에 흰 스커트를 입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예의 바르게 입꼬리를 씩 올려 보이고선 파트너의 움직임에 맞춰 빙그르르 돈다. 여자가 춤판 한복판으로 사라지고 내 앞엔 폴로 셔츠를 입은 배 나온 아저씨가 와있다.

바다와 이어지는 강변을 따라 걷는다. 이대로 30분 정도 내리 걸으면 대형 크루즈가 정박해있는 항구가 나온다. 그 옆에는 관광객들로 가득 찬 돌계단이 있기 때문에 나는 자주 이 길로 간다. 점점 날이 지고 있다. 서쪽 하늘은 이미 보라빛으로 물들어 필리핀에서 봤던 노을같다. 자전거가 한 대, 웃통 벗은 남자 한 명, 후디 입은 여자 세 명, 강아지가 두 마리. 풀숲에 앉아 잠시 늑장을 부리고선 다시 길을 간다.

저녁으론 중식을 먹을지 고민해 본다. 도착한 어느 중국요리집 앞에서 가득찬 인파를 확인하고 돌아 서서 피자와 해시브라운을 같이 파는 펍에 들어왔다. 비프 타코와 파인트 맥주 한 잔을 시켰다. 주변이 시끄럽다 했더니, TV에 인기 럭비팀 ‘왈라비스’의 경기 중계가 한창이다. 아무 곳이나 들어왔는데 스포츠펍이었던 건지 가게 한 켠을 보니 베팅 머신 두 대가 나란히 붙어있다. 잔뜩 어깨를 좁히고 베팅에 집중하던 남자가 별안간 중얼거리기 시작하는데, shit 외에는 잘 들리지 않아 애써 관심을 접었다.

부른 배를 쥐고 역 앞 벤치에 앉았다. 집은 가야 하는데, 트램을 탈지 걸어갈지 고민이 됐다. 멀리서 파 티가 시작 됐는지 클럽 음악이 들려온다. 슬슬 추운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옆에 누가 앉았다. 헤이. 하와 유, 다소 정직한 발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모르는 사람이다.

파든? - 하유두인. 아유얼론? 주변을 둘러보니 도움 청할 만한 사람이 없다. 불편한 미소를 지으며 암낫인터레스티드, 답했다. 서운하다는 표정도 잠시, 활짝 웃으며 플리즈리슨투미, 아이워너비유어프렌드 라며 엉덩이를 당겨 앉는다. 황당함에 나를 아냐고 묻는데 모르지만 이제부터 알아가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털고 일어나 걸어가는데, 얼마 못 가 누가 시킨 것처럼 돌아봤다. 이유는 몰랐다. 벤치 바닥에 아무렇게나 기대 놓은 백팩과 짧동한 바지 밑단을 이유 삼기로 했다. 휘적휘적 걸어가 왓두유원트프롬 미, 라고 물었다. 아이톨쥬. 위캔비프렌드.

우리는 가장 가까운 펍에 왔다. 다른 술을 못마셔서 맥주만 마신 탓에 저그 세 통을 비웠다. 네번째로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직원이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길거리에 백팩 가방끈이 질질 끌렸다. 가방끈이 영어로 생각이 안나 스트링, 유어 스트링 했더니 역도하듯 가방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들고 간다. 마냥 걷다보니 오른쪽으로 강을 건너는 다리가 보였다. 지긋이 바라보다 다리로 향하니 금방 따라온다. 가다 말고 웨얼알유고잉, 하니 유,라고 말한다. 가만히 서있는데 다리는 절뚝거리고 머리는 미세하게 도리질 중이다. 나는 두유라이크스위밍? 라고 한다.

웅웅 소리는 귀청이 터질 것 같다. 천장이 이런 모양이었나, 귀가 물에 잠기니 더 시끄러웠다. 오른쪽 벽은 나무 숲, 왼쪽 벽은 빛이 드는 통창이었는데 밤이 되니 깜깜해서 사방이 숲같다. 아이필라이크암인 더포레스트. 얕은 쪽에서 둥둥 떠다니더니 금방 미끄러져 와 왓디쥬세이? 라고 말한다. 아이필라이크암 인포레스트. 무슨 신호였는지 모르지만 그 애가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 될 대로 되라지.

아, 나는 수채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