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여름밤에 대한 기억은 거실에 우리 가족 다섯명이 동그랗게
모여앉은 장면에서 시작된다. 무더움이 조금 가신 밤, 다섯 명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수박 먹고 빙수 먹고 시원한 오이 썰어서 얼굴에 붙이고 그랬다.
공부를 하지 않고 놀아도 되는 합법적인 시간. 텔레비전 뉴 스에서는
여름을 맞이하여 해수욕장에 인파가 몰렸다, 계곡에 나들이를 간다, 야외
수영장에도 사람이 꽉 찼다, 등의 뉴스가 나오고 그걸 본 아빠는 딸들에게
주말에 저기 갈까? 하고 물어본다. 그러면 딸들보다 엄마가 먼저, 자기가
가고 싶나 보지? 라고 한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깔깔깔 웃는다.
어쨌든 주말에는 피서로 아빠가 가고 싶은 곳을 가게 된다. 바다든,
계곡이든.
요즘의 피서는 어딘가 낯설다. 피서를 검색하니
해수욕장 대신 호캉스가 뜬다. 돈이 없으면 피서를 갈 자격이 없어진 것
같다. 빙수 만들어 먹고 화채 썰어 먹던 소박함도 없어졌다. 없어진 건
하나 더 있다. 더위가 없어졌다. 더위를 피하자는 것이었지, 아예
벗어나자는 것은 아니었는데. 피서로 호캉스를 가면 온종일 시원한
실내에서 놀고 자고 먹으며 계절을 잊는다. 추운 나라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많다. 아예 더위가 없는 나라로 피하는 것이다. 어딘가로 가지
않는 사람들도 시원한 집, 카페, 도서관으로, 더위 밖으로 피신한다.
그렇게 피서에서 더위가 사라졌다.
인공 불빛 때문에 별 보기가
힘든 도시의 밤하늘처럼, 에어컨이 어디든 존재하는 요즘의 실내에서
여름다운 더위를 느낄 기회는 박탈된다. 하지만 녹진하게 더위를 겪어보지
않으면 그게 여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릴 적, 그러니까 땀에 젖는
출근복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쫓겨 더위가 짜증날 일이 없던,
어린 시절의 더위를 떠올려본다. 그 시절의 더위는 짜증나고 피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름이라서 물놀이가고 빙수먹던 기억이 더
진하게 남았지, 더운 게 싫었던 기억은 없다. 여름은 더운 게
당연하니까,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였을까. 어휴 덥다고 짜증내며
에어컨부터 찾게 된 건.
바빠도 계절을 챙기자는 교훈적인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내 삶 속에 계절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어 서운할 뿐이다. 그래서 다시 계절을 느끼고 싶어서, 여름답게 더위를
즐기고 싶어서 그 방법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최근 들어 뭘 할 때 가장
여름다웠지? 떠오르는 생각의 면면들을 보면 일상 속의 소소한
것들이다.
첫 번째로 찾은 더위를 즐기는 방법이다. 가만히
매미소리에 귀 기울여보기. 그 소리는 싱그러운 여름 자체다. 장마가 끝난
후 땡볕이 시작될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매미소리로 여름이 왔음을
실감한다. 쌩쌩하게 울부짖은 매미소리를 촉 감으로 환산하면
‘시원하다’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미소리를 떠올릴 때 더위 속의
시끄러움으로 기억하는가, 아니면 시원하고 싱그러운 여름의 소리로
기억하는가. 후자로 기억할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그래서 매미소 리는,
그 소리 자체로 시원함을 품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매미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더위 속 한줄기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여름밤 달리기이다. 밤 9시 정도가 좋다. 요즘같이 더운 날에
밖에서 운동이라니 질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첫 발을 내디뎌 달리기
시작하면 귓가에 스치는 바람이 생각보다 시원하다는 걸 금방 알게 된다.
길을 따라 쭉 내달으면 푸른 잎이 가득 달린 나무, 길 게 자란 길 가의
풀꽃들도 볼 수 있다. 앞뒤로 달리는 사람들의 짧고 경쾌해진 차림새도
눈에 띈다. 풀 벌레 소리도 진동한다. 평소에 걸어 다닐 땐 더위를
피하느라 손으로, 양산으로 가리던 시야가 밝게 트이니 비로소 감각하 게
되는 것들이다. 온 감각으로 여름을 느끼고 몸도 땀으로 흠뻑 젖으면, 집에
와서 개운하게 샤워를 하면 된다. 이 시원한 샤워는 여름 달리기의 정점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창문을 열거나 선풍기를 틀고 잠을
자보기. 생각보다 정말 시원하다. 요즘은 에어컨을 수면모드를 틀고 많이들
잠을 청하지만, 솔솔 부는 바람으로도 충분히 숙면할 수 있다. 바 람만
닿아도 체온이 상당히 내려간다. 기분도 좋아진다. 공기를 차게 하는
에어컨보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훨씬 부드럽다. 특히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 바람은 어쩔 땐 세게, 어떨 땐 약하게 달라지는데 이건 여름밤이
선사하는 자장가다. 바람이 세게 불어올 때마다 아 시원해,를 몇 번 하고
나면 어느새 잠에 들어있다.
네 번째, 화채 먹기. 빙수도
좋다. 어릴 적 여름만 되면 화채 언제 먹어? 빙수 언제 만들어? 하고
엄마를 들볶으며 연례 행사 같은 그날을 기다렸다. 엄마가 수박을 탁탁
써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등장한, 속살이
발간 수박을 차가운 얼음과 아삭아삭 오독오독 먹을 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 게 여름 특식으로 늘 화채를 먹던 어느 날, 아빠가
빙수 기계를 사왔다. 그 기계로 처음 만든 첫 우리집표 팥빙수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아직도 팥만 들어간 옛날 빙수를 가장 좋아한다. 여름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있고 그 음식을 생각할 때 행복해지는 것은, 그 계절과
더위를 긍정하게 만든다. 더우면 또 그걸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가 먼저 들기
때문에.
다섯 번째, 정말 참을 수 없이 더울 때에만 에어컨을
트는 것. 어릴 적 우리 집 에어컨은 전원 버튼을 눌러서 켤 때 아주 맑은
띠리링 소리가 났다. 그리고 온도를 조절하려 버튼을 몇 번 더 누를 때도
띵띵하며 맑은 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위이잉하며 위가 열리며 들리는
시원한 바람 소리. 이 소리들을 상상만 했는데 시원해진다. 정말 더운
날에만 트는 에어컨이 그때는 그렇게도 반갑고 시원했다. 뜨끈해진 얼굴로
쐬는 찬 바람은 얼마나 행복한지. 당연한 듯 24시간 틀어져 있는 에어컨을
쐴 때와 비교하여 그 행복감은 차원이 다르다.
이 목록은 매우
주관적인 것들이다. 여름 더위를 긍정하게 만드는 기억은 내 속에 있다. 그
기억들을 꺼내보자. 지금은 여름 물놀이를 가지 않게 됐다면, 어릴 적
추억을 되살려보자. 시원한 물속으로 떠나고 싶어질 것이다. 호텔 빙수도
좋지만 가끔은 수박 썰어 화채도 해먹어보자. 분명 색다른 여름의 맛이
느껴질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맞는 여름에도 즐길 거리들이 생길
것이다. 진짜 피서는 여름답게 더위를 제대로 즐겨보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