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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밑의 흰 손

    1.
  나는 이야기하는 일을 사랑한다.

  증거를 나열해 본다: 글쓰기를 좋아한다(예삿일이 아니다). 극적인 일을 겪게 되면 보물이라도 찾아낸 것처럼 두근거린다. 아무리 봉변을 당해도, 무언가 실소가 나오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따가 친구 만나면 이거 꼭 말해줘야지’ 따위 생각을 해버린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이 감탄사-엥? 그래서? 대체 왜? 어떻게?-를 뱉으면 얼마나 큰 희열을 느끼는지 모른다.

  혹시 내가 남 말 옮기는 일도 즐기는 인간인가 오해할 수도 있겠다. 다른 사람 흉 보는 이야기를 좋아하거나, 어디서 주워 들은 것을 스스로 겪은 양 하는 허풍쟁이들도 세상엔 많으니까. 하지만 좀 다르다. 난 참말로 반칙하지 않는다. 몸소 겪었거나 기막히게 꾸며낸 이야기가 잘 먹혔을 때만 진심으로 ‘한 건 했다’라고 생각하거든. 웃기거나 무서운 이야기라면 효능감이 두 배로 커진다. 듣는 사람의 감각을 자극-기분 좋게 아픈 배, 갑작스러운 한기-하는 데에 이런 부류 이야기만큼 좋은 게 없다. 게다가 공포스러운 얘기- ‘내 불투명한 미래가 무서워요’ 따위 존재론은 김이 새니까 논외-는 웃긴 이야기보다 드물어서 약간 더 귀중하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불가해성이 아닐까? 예컨대, 홀로 야근 중인 사무실에서 이미 퇴근한 동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무섭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미스터리를 마주치기 쉽지 않으니 으스스한 이야기도 흔치 않은데, 내게는 잘 장전된 탄환처럼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내보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특히 여름마다 꼭 내어놓는 진짜 내 이야기.

    2.
  내가 열네 살 때는 하두리로 ‘캠사’를 찍는 게 제법 인기 있었다. 하두리는 웹캠을 컴퓨터에 연결하여 셀카를 찍을 때 사용하는 프로그램이고, 캠사는 캠 사진의 준말이다. 하두리를 사용하면 사진을 한 컷을 찍을 수도, 여러 장을 연속으로 촬영한 후 이어 붙여 반복하며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촬영 간격이 길었던 탓에 연속 사진은 움직임이 뚝뚝 끊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열 몇, 스물 몇살짜리 어린애들 사이에서는 결과물을 싸이월드에 올리는 게 당시에는 가장 인기 있는 놀이었다.

  나도 하두리 사진을 찍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웹캠은 피시방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우리 엄마는 다른 집 엄마들과는 달리 내가 피시방에 출입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캠사를 찍어서 우리 반 싸이 클럽에 올려야 내가 반에서 사교적인 아이로 입지를 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구원자는 아빠였다. 날 피시방에 보내준 것은 아니고, 어느 날 35만 화소짜리 디지털카메라를 어디선가 공짜로 얻어온 것이다. 그 허접한 디카를 컴퓨터에 연결하면 무려 웹캠이 되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반나절 꼬박 하두리로 사진을 수십 장 찍으며 놀았다. 다음 날에는 오로지 사진을 찍으며 놀기 위해 단짝이었던 양지를 우리 집에 불렀다.

  교실에는 이런저런 역할이 있다. 모범생, 오타쿠, 양아치, 조용한 애 같은 거. 양지랑 나는 같은 부류-시도 때도 없는 장난꾸러기들-였다. 그러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 짖궂은 짓은 혼자 치는 것보다 공모자가 있는 게 더 즐거우므로.

  어떤 애들은 애초부터 넉살 좋고 우스갯소리 잘하는 중년 여자로 태어나는 것만 같다. 급식에 나물과 고추장 소고기가 나오면 밥통에 주저 없이 전부 부어 28인분짜리 비빔밥을 만들던 양지도 그런 부류였다. 걔는 늘 시끄럽게 목을 긁으며 ‘끄얼 끄얼’ 웃었다. 가끔은 웃음소리가 요란하다는 이유만으로 선생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런 괄괄함이 그의 매력인 걸 모르고. 나이에 맞지 않게 입담이 좋았던 양지는 혼나면서도 꼭 한 마디를 덧붙여 매를 벌었다.

  여중생이라기보단 ‘초딩 머스마’에 가까웠던 나도 양지 못지않게 설쳤다. 재치 있는 말을 얹을 기회가 있으면 절간처럼 조용한 곳에서도 참지를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ADHD 때문인 것 같지만, 아무튼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다 선생에게 많이 혼났다. 그리고 손바닥을 맞을 때 내 옆에는 늘 양지가 있었다.

  물론 다른 점도 많았다. 가령 성적은 비슷했지만 내가 양지보다 학원을 더 많이 다녔다. 걔는 비비크림과 틴트를 늘 챙겼지만, 나는 늘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녔다. 그러나 내게 가장 중요했던 우리의 차이는 성징이었다. 그즈음 양지를 포함한 우리 반 애들은 거의 다 초경을 겪었고, 나는 아니었다. 우리 반에서 양지랑 가장 친한 친구는 원래 난데, 걔가 다른 애들과 생리대를 빌린다느니 아랫배가 아파 양호실에 가야겠다느니 하는 대화를 할 때마다 나는 도무지 끼질 못했다. 양지는 생리통이 심해 월경 첫째 날에는 죽은 듯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에게 괜찮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신경질뿐이었다. 그럼 나도 기분이 상해서 그날 하루는 그가 교실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생리가 대체 뭐라고 유난인지, 걔가 부리는 짜증은 도무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었다. 생리를 시작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이 여자로 변신하게 될 것만 같았다. 책상에 붙어 노곤하게 풀어져 있는 양지처럼. 눅눅하고 곡선적인, 복잡하고 히스테릭한 존재로. 사실 가슴에 멍울이 잡힐 때부터 나는 아이로서의 삶에 끝이 보이는 것 같아 슬펐다. 난 평생 애로 살고 싶었다. 다 큰 여성이라면 어쩔 수 없이 짊어지는 관능의 무게를, 막연히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하두리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자면.

  반에서 광대 역할을 담당하면, 마스코트라도 된 양 항상 재미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날도 그랬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갖은 예쁜 척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뽀샤시’한 얼굴을 위해 스탠드 조명을 켜고, 최대한 앵글을 위로 올려 작은 얼굴과 큰 눈을 연출하는 식이었다. 그러던 와중 양지가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 좀 웃기는 것도 찍으면 안 되나? 싸이에 재밌는 것도 하나 올려야지. ”

  이런 건 어떤데, 하고선 걔가 상모돌리기 하듯 목을 돌리기 시작했다. 볼륨 파마를 한 단발머리가 원을 그리며 통통 튀었다. 다들 볼 옆에 손을 대고 입술을 모으면서 귀여운 포즈만 취하는데, 이런 캠사는 그 누구도 찍은 적이 없었다. 장난치는 데에는 양지만큼 머리를 잘 굴리는 애도 없다고 감탄하며 걔를 따라 나도 함께 머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상반신은 고정한 채로 목만 움직이는 게 포인트였다. 어지러울 정도로 고개를 흔들었는데도 왜 이리 재밌는지, 요란스럽게 한바탕 웃었다. 마음 속 웃음을 싹싹 긁어 토해내려는 듯 비명을 지르면서.

  한두 시간 더 사진을 찍다가, 특히 잘 나왔거나 재미있는 것 몇 장을 골라 우리 반 싸이 클럽에 올렸다. ‘1학년 9반 최고 얼짱 두 명’ 따위 싱거운 문구와 함께. 게시글을 작성하는 중에도 우리 입에서는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이걸 보면 다른 애들이 얼마나 재밌어할까. 리플-그 당시에는 댓글이라는 말이 없었다-이 많이 달릴 것 같아서 신이 났다.

  다음날 하교한 즈음이었나.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게시글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열댓 개 정도 리플이 달려 있었다. 우리 반 애들 절반은 써 준 거니 제법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대부분 정말 웃기다느니, 귀엽다느니 따위 칭찬이었는데, 가장 마지막에 달린 반장 M의 코멘트가 조금 달랐다.

‘양쥐랑 ㅁl니땜에 못살아 ㅋㅋ 넘 귀엽자Lr >⩊< 근뎅 3번 사진에 팔은 머야 (╥ ﹏╥)’

  세 번째는 양지와 내가 머리를 흔드는 모습을 찍은 움직이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 머리칼이 흩날리는 모습이 잘 보여야 하니 의자를 살짝 뒤로 뺐기 때문에 우리 허벅지는 책상에 가려 절반만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정체불명의 팔이 상 밑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는 모습이 찍힌 게 아닌가. 푸른 빛이 돌 정도로 창백하고 가느다란 팔 끝에는 곱고 날씬한 여자의 손이 있었다. 정작 사진을 찍었던 날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건 정말로 손이었다. 흰 섬섬옥수는 천천히 내 하복부 언저리까지 올라왔다가 멈췄다. 그러고선 교복 치마를 잡아 뜯기라도 하듯 배를 움켜쥐었다. 그게 마지막 컷이라 다음은 알 수 없었다. 두 눈으로 봤는데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반복 재생되는 사진을 우두커니 바라만 봤다. 그날 집에는 양지랑 나 둘뿐이었는데, 저건 누구지? 내게서 뭘 가져가려는 걸까?

  여기까지 얘기하면 모두 같은 질문을 한다. 그런 대단한 심령사진을 찍었는데 혹시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지? 아깝지만 컴퓨터를 바꾸면서 파일을 잃어버렸다. 싸이월드 클럽도 애초에 서비스를 종료했기 때문에 옛 파일을 되살릴 방법이 없다. 사진을 지키는 일에 왜 이리 소홀했는지 변명하자면 첫째로, 그때는 디지털 자료가 이렇게나 쉽게 휘발되는지 몰랐다. 알았다면 사본을 여러 개 만들어서 여기저기 보관해 두었을 텐데. 게다가 그 당시에는 정체불명의 손이 사진에 찍힌 일이 이렇게나 해괴한 것인지 미처 몰랐다. 좀 미심쩍다는 감각은 어렴풋이 있었는데도.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사진을 본 사람들 전부 다 그랬다. 부모님도, 언니도, 양지와 친구들도 그저 흥미로운 에피소드로만 생각하고 지나갔다. 친구 하나는 저게 뭐냐고 깔깔 웃기도 했다. 난 요즘 오히려 그 사진을 생각하면 책상 아래에 서늘하게 한기가 도는 것만 같아 발가락을 오므리게 되는데. 그땐 다들 어디에 홀렸던 게 아니었을까? 사족을 덧붙이자면 우리 가족은 아직도 같은 집에 계속 살고 있고, 티브이에 괴담 따위가 나올 때마다 늘 흰 손 얘기를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시는 흰 손을 보지 못했다.

    3.
  흰 손이 아랫배를 쥐어 잡는 장면을 확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초경을 했다. 자다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는데 속옷에 빨간 얼룩이 묻어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생리라는 걸 직감했지만 못 본 체하고 싶어 샤워기로 연신 씻었다. 아무리 해도 피가 멎질 않았다. 욕실 바닥 위로 흐르는 연한 핏물을 보니 아득해졌다. 이젠 다 끝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엄마! 여기로 좀 와봐라! 화장실 문밖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눈물이 왈칵 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