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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러캔스

  어릴 때, 그러니까 스물여섯 살 때 나는 아주 슬펐다. 낙오의 감각을 명시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남한테 뒤처지는 일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지만, 그때처럼 선명했던 적은 별로 없다….

  난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학부 과정을 졸업했다. 다시 말해 스물여섯 살일 때도 대학생이었다. 학교를 오래 다닌 이유는 휴학계를 가능한 한 전부 사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이가 몇이 되건 대학생이라는 것 자체는 약점이 아닐 테다. 내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같이 입학했던 애들이 하나둘 졸업하는데 나만 학교에 남아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친한 친구들도, 재수생 동기들도, 삼수생이었던 당시 애인도, 군대 다녀온 남자애들도 모두 어딘가-인턴십, 대학원, 공채, 유학 따위-로 떠났다. 심지어 난 ‘현역’으로 학교에 들어왔는데. 말 그대로 살아 있는 화석이 된 기분이었다. 외따로 앉아 나보다 대여섯 살 어린 애들이랑 같이 수업을 듣는 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생각보다 굴욕적이다. 낯익은 강의실에 가득 찬 잘 모르는 얼굴들, 그래봤자 띠동갑 차이도 안 나는 것들이 날 되게 노땅 취급해서 마치 예순두 살이 된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게 얼마나 불쾌했는지. 안 그래도 뒤처진 것 같아 조급해 죽겠다는 사람을 두고!

  가끔 상상한다. 만약 해야 할 일이나 야망이 있어서 학교를 쉬었던 거라면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킬 수도 있었을까.

  1학년 때 친구랑 교양수업을 듣는데, 엄청 쌔끈한(이런 저급한 표현 미안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말로만 표현할 수 있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여자 하나가 강의실에 들어오더니 구석에 앉는 거 아닌가. 헐. 알고 봤더니 한 번 제적된 적 있는데 다시 학교에 돌아온, 나도 노래를 몇 곡 아는 싱어송라이터였다. 그이는 초-초-초 고학번인 데다가, 자기의 존재감을 죽이기 위해 캡 모자를 눌러쓴 채 귀퉁이에 잠복하듯 있었는데도 빛이 났다. 초-초-초 고학번이 되었을 때 강의실에서 나는 존나 음울했는데. 우리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나는 그냥 쉰 사람이었고, 그는 무언가 하려고 쉰 사람이었다는 점 아니었을까… . 아니 그 싱어송라이터처럼 비범한 업적을 쌓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보통은 무언가에 몰두하기 위해(예: 시험 준비) 휴학을 했다. 하지만 난 씨발 아니었다. 누가 ‘혹시 쉬는 동안 뭘 하셨어요?’나 ‘고시 준비 하셨나요?’라고 물어보면 대답을 지어내느라 늘 쩔쩔맸다.

  사실 난 아파서 쉬었다. 좀 부끄럽지만 난 20대 내내 ADHD랑 약간의 강박증이 결합하여 새끼를 친 우울증 및 불안장애(대박 길다)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지냈다. 특히 중간시험쯤이 되면 불안 증세가 심해져서 휴학계를 냈다. 그때 나는 강박이 심해서 시험이 무서웠다. 고작 대학 시험인데 오바하는 거 아니냐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제야 생각하면 솔직히 나도 웃음을 참기가 어렵지만 당시에는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중간고사 같은거 뭣도 아닌 거라는 사실을 인지 오류 없이 잘 받아들였다면 난 정병맨이 아니었겠지. 게다가 스물여섯 살에는 끔찍하게도 사용할 수 있는 휴학이 남아있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학교에 다녔다.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자퇴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대학을 보내 준 부모에 대한 도리가 있어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그러나 이 사람은 몇 년 뒤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대학원을 때려치운다).

  이런 종류의 정신질환, 즉 타인에게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정병을 낭만화하는 환우와 그 주변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다소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발언 죄송하지만 부러워서 하는 말이다. 아쉽게도 난 멜랑콜리아를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때 내 마음은 이랬다: ‘저는 누구보다 정상성에 복무하고 싶은 사람인데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오. 대가리에 힘줘서 이 고통을 반드시 졸라 빠르게 이겨내겠소… .’ 날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네가 웬 정상성 타령이냐고 코웃음을 치겠지만, 솔직히 지금도 마음 한 편엔 이성과 결혼해서 애 둘 낳고 신축 아파트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약간은 있을 정도다. 게다가 그땐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더 잘 몰랐기 때문에 남들 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만약 정병도 내 일부라는 사실을 얼른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자기혐오를 빨리 멈췄다면 병세가 좀 회복되었을까. 열심히 머리에 힘줘서 정병 낫기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

  아무튼 스물여섯 살 나는 나름대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학교에 아예 안 나가고 싶었지만 그럼 학사 경고 맞아서 한 학기 더 다녀야 했기 때문에, 아침마다 울면서 기상할 정도로 곤란했다.

  그런 와중에도 찾은 유희가 하나 있었는데, 사는 일이 딱할 때마다 삶에서 나만 발라낸 뒤 남겨진 딱한 부분을 조감하고 웃는 일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좋은 재료가 되었다: 좋아하는 애 앞에서 예쁜 척 엄청 하면서 술 마시다가 과음해서 걔 앞에서 토한 일. 스트레스 푼답시고 담배 뻑뻑 피우다가 아끼는 티셔츠에 구멍 냈다고 길에서 오열한 일. 일종의 자학을 위해 클럽에서 아무나 같이 놀았는데, 막상 방 잡을 때가 되니까 무서워서 상대방만 남겨두고 튄 일 같은 거. 전부 내 일이라 생각하면 망신스럽고 괴롭지만, 한 발 짝 떨어져서 보면 처참하게 웃기다. 그래, 웃기다. 가끔은 솔직히 안 웃길 때도 있었는데 억지로 비웃었다. 나 자신마저도 서슴없이 놀리면,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수치심과 결핍마저도 손에 쥐고 있다는 기묘한 권능 같은 것. 난 가장 우울할 때, 왜 사람들이 개그라는 짓을 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달 전이었나. 내가 대학 마지막 1년을 버틴 비결을 친한 후배에게 얘기했더니 걔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

  “헐, 언니. 저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거 이인증이래요. 우울증 증상. ”

  이인증이란 심리적으로 곤궁한 상태가 되면 감정과 현실을 분리해서, 고통으로부터 나 자신을 방어하려는 기제라고 했다. 아, 나는 내가 진짜로 재미있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우울증의 농간이었다니. 그간 속고 살아온 세월이 우스워서 또 깔깔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