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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
개그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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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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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신예지
글에서는 진짜 나를 숨길 수 없다. 그걸 깨달은 건 어느 수요일 저녁, 글
쓰기 모임에서였다. 내가 내 글을 동그마니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득 와
정말 나 같네, 라고 느낀 것이다. ‘피서’를 주제로 누군가는 몽롱하고
화창한 글을, 누군가는 초현실주의 같은 글을, 누군가는 흥미진진한 글을
썼다. 내 글은 여름사랑모임에서 발표한 공지글 같다(총 다섯 가지 레슨이
있다). 멋진 표현과 수식어를 쓰고 싶은 내 의지와는 달리 내 글은 멋 없고
담담한 내 모습 그대로다. 마치 거울처럼 나를 그대로 비추어내고 있는 내
글.
이렇게까지 나를 드러낸 날것의 무언가를 내놓는 것이 어색하다. 그간 나의
결과물에는 '완료' 수식어가 붙어있었다. 나는 나의 손을 떠나는 크고 작은
것들에 대해 필요 이상의 완벽함을 지향했다. 회사에서의 최종 완료 보고서
같이 말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완벽함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쓰는 가면이라는 결과 물로 나타났다. 회사에서는 이런 가면, 친구들에게는
저런 가면, 모임에서는 또 다른 가면. 이런저런 가면을 써가며 나라는
존재의 완벽성을 꾸며내려고 하던 나이지만, 글에까지 가면을 부여하기엔
나의 실력이 부족하므로. 그리하여 차마 가면을 쓰지 못한, 망설이고 긴
장하면서도 내 생각만은 또박또박 전하는, 요령 없지만 성실한 내 본모습이
글에는 그대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내 입으로 내가 성실하다
말하는 건 민망하지만, 어린 시절 통지표에는 그 단어가 자주 등장 했다.
특출난 건 없고 그저 묵묵히 해내는 태도에 그럴듯한 수식어를 붙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일하는 모습을 봐도 성실하다 할만하다
여긴다. 어쨌든 해야 할 일은 묵묵히 하기 때문에. 티가 나든 아니든 해야
하는 일이면 일단 하는 나라서. 그래서 내 글에도 도통 요령이란 게 없다.
센스 있는 문장보단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를 말한다. 사실 글을 멋있
게 쓰는 것에도, 내 감정을 다루는 것도, 내 생각을 전하는 것에도 영
요령이 없는 탓이다. 세상 살아가는데도 요령이 없다. 나는 늘 요령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성실할 수밖에.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튼
글을 보면 심심한 내 성격이 너무 보여서, 나도 참 재미없게 산다
싶다가도. 친구들에게는 너 되게 웃겨, 라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제야
내가 이렇게 노잼인 것을 깨달았는데, 친구들은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한다.
대체 뭐가 웃겨? 하고 물으면 그냥 반응이 웃기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머리를 굴려서 내놓는 회심의 농담에 대해서는 반응이
미지근한데, 아무 생 각 없이 대답하거나 반응을 할 때 사람들은
웃겨죽는다. 특히 놀릴 때 반응이 아주 재밌다고들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놀리는 자와 놀림을 당하는 자로 나뉜다면, 나는 그중에 후자다.
그냥 서 있으면 키 작다고 놀리고, 밥 먹을 땐 새모이 만큼만 먹는다고
놀린다. 퇴근한다고 하면 어딜 가냐고 놀리고. 쓰다 보니 열받는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발끈하면 상대방은 만족스럽 게 웃는다. 역시 놀릴 때 제일
재밌다고. 반응하는 것도 아주 성실하게 한다. 첫 번째로 놀리든 백 번째로
놀리든 성실하게 꼬박꼬박 발끈하는 그 반응. 이것마저 성실하다니. 이런
성실함으로 개그캐가 되려던 것은 아닌데….
어릴 때는 나도 꽤
재밌는 애라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라던가. 회심의 농담
같은 거 말고 그냥 툭 나오는 농담들. 괴상하게 지어주는 친구 별명 같은
것 말이다. 상대가 웃겨 할지 혹시 기분 나빠하지 않을지 같은 걸 고민하지
않고 나오는 순수한 농담. 이 말을 하면 팀장님이 재밌어하겠지? 이럴 땐
이런 농담을 하면 분위기가 리프레시 되지 않을까? 하던 게 아닌. 나는
얼마 전까지 농담까지 완벽하게 하려고 했다. 의무감과 책임감의 발로였던
그 농담들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문득, 놀림당할 때 발끈해서
반응하는 나에게는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
힘을 좀 빼야 하는구나. 꽉 쥔 주먹을 풀고 의도를 덜어내고 책임감도
털고… 그냥 가볍게 툭 던져도 되는 것을. 조금 흐트러져도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또는 흐트러지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힘을 꽉 준
채 살아보고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