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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미셸을 처음 만난 건 작년 4월 이브닝 스타 호텔 펍에서였다. 당시에 나는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를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에 매번 어학원 수업이 끝나면 애프터 스쿨 액티비티에 갔다. 그날도 팔자에 없는 이스터에그 꾸미기를 하고 있었는데, 마주 앉은 한국인 여자분이 친구 사귀고 싶으면 여기 오지 말고 이런 곳을 가보라며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하나 보여주었다. 이후로 헛헛한 저녁이면 뻔질나게 펍을 출입하면서 그가 소개했던 곳이 워홀러라면 한 번씩은 거쳐가는 언어교환 파티였단 걸 알게 되었다.

    처음 본 미셸은 침침한 조명 밑 당구대 옆 스툴에 서서 낯선 이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찾는 척하며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일부러 바삐 서성였을 거고, 미셸이 먼저 말을 걸었을 것이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미셸과도 호주 온지는 얼마나 됐는지, 얼마나 있을 건지, 무슨 비자로 왔는지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공유하고 헤어졌다.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미셸 덕이라 생각한다. 미셸은 내가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릴 때마다 가벼운 안부 혹은 사진 속 바다가 어디인지를 물었고, 언제는 한 번 스케줄을 정리해 내밀며 다음주 언제가 만나기에 편한지를 물었다. 우리는 시티 한가운데 있는 3 Wise Monkeys Pub의 2층에서 두 번째로 만났는데, 문제는 그때 이미 내가 피부병으로 인해 호주를 떠나기로 마음을 반쯤 먹은 상태였다. 술을 하지 않아 스프라이트를 앞에 두고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미셸은 얼마나 아플지 마음을 쓰면서도 돌아가지 말라는 농담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미셸과의 세번째 만남은 나의 송별파티에서 이뤄졌다. 파티 초대 문자를 보내자 미셸은 ‘진짜 가는구나, 슬프다. 파티 갈게, 작별인사 하고 싶어.’라고 답하고 울월스 마트에서 초콜릿 케이크 한 판을 사서 들고 왔다. 한국에 돌아와 머무는 동안에도 미셸은 스토리에 매번 답장을 보내거나, 최소한 눈물과 웃음이 같이 터지는 얼굴 이모티콘이라도 보냈다.

    피부병이 가라앉고 호주도 건조한 겨울 기후를 벗어났을 때쯤, 나는 다시 호주로 갈 계획을 세웠다. 다만 원래 지내던 시드니가 아닌 브리즈번 지역에서 새로이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그쯤 미셸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브리즈번에 도착하는 시기에 미셸도 마침 브리즈번 휴가 계획을 세워두었다는 소식이었다. 우린 기막힌 우연을 감탄하며 낯선 도시에서 네번째로 만나기로 했다. 알고 보니 우린 같은 숙소 같은 층 옆옆 방에 묵었다. 미셸과 나는 아침에 호스텔 로비에서 만나서 저녁에 옥상 공유 주방에서 밥을 먹었다. 퀸즐랜드 대학교 교정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 뒤 연못에 쌍무지개가 뜬 것도 보고, 명물이라는 룬 크로아상도 포장해다가 벤치에 앉아서 나눠 먹었다.

    브리즈번 도심엔 유독 쓰레기 새가 많았다. 쓰레기통에서 음식물을 주워다 먹어서 쓰레기 새고, 영어로는 Bin Chicken이라 부르는데, 몇 마리가 우리의 크로아상에 눈독을 들이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미셸은 몸을 옹송그리고 들고 있던 크로아상을 보호하며 너희들 줄 건 없다고 말했다. 쓰레기 새는 미셸의 완고함을 확인하자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쓰레기 새는 높은 쓰레기통에 올라탈 때를 제외하면 날지 않는다) 우린 빈 치킨이 떠난 자리에서 나중에 같이 타즈매니아로 여행 갈 것을 다짐했다.

    미셸과는 브리즈번 여행이 끝나고 더 친해졌다. 내가 브리즈번에 몇 박 머물고선 시드니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미셸의 친구 티나, 내 친구 유이까지 이렇게 넷이 모이면 주말마다 1시간씩 버스를 타고 노을을 보러 갔다. 놀러 가는 길에 걷다가 돌아보면 미셸은 저 뒤에 뒤처져 올 때가 많았는데, 주로 유이 혹은 티나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 나누다가 껄껄 웃느라 대열에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미셸은 누구하고도 대화가 잘 통했다. 일이 구해지지 않거나, 피부병이 재발할 것 같다는 자질구레한 슬픔도 미셸과 얘기하다 보면 가벼워졌다. 미셸은 네이티브 스피커였는데, 나와 말할 땐 교과서 같은 영어 문장을 써서 같이 대화할 때면 내가 영어를 무지무지 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셸은 여기저기 친구가 많았다.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일본, 한국 친구가 많았다. 미셸은 뉴질랜드에서 자랐고 시드니에 온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중국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브닝 스타 호텔 펍에서 마주쳤을 때도 나는 왠지 그가 중국에서 왔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질끈 묶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코 옆의 큰 점이 중국인처럼 시원시원했다.

    해외에서 아시안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서로서로 간단한 모국어를 알려줄 때가 많다. 내가 아는 중국인 친구들은 모두 중국어를 어설프게 내뱉을 때마다 한 목소리로 성조를 고쳐주곤 했는데, 미셸은 실수로라도 중국어를 한 적이 없었다. 가끔 서양인들은 마라탕의 진짜 맛을 모른다며, 노스 스트라스필드에 놀러오면 Authentic한 마라탕 집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던 것 외에 미셸은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뉴질랜드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미셸은 말수가 적은 건 아니었지만 항상 상대방에 대해 이야기했다. 심각하게 유이와 이야기 나누는 걸 잠깐 엿들을 때면, 늘 열성적으로 네 남자친구가 얼마나 네게 배려없이 행동했는지, 넌 그보다 얼마나 더 나은 존재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온 마음을 다해 내 옆에 있었다. 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작년 12월, 미셸은 뉴질랜드에 갔다가 호주에서 아버지를 만난다고 했다. 티나에게 남긴 그 메시지 이후로 미셸은 누구와도 연락이 닿질 않는다. 한 주가 지났을 땐 그러려니 했고, 한 달이 지났을 땐 경찰에 신고를 했다. 호주 경찰은 미셸이 뉴질랜드 국적이라 실종 수사에 한계가 있다고 했고, 확실한 건 미셸이 호주에 없다는 사실만 확인해 줄 수 있다고 했다. 티나와 나, 유이는 미셸이 다니던 IT 회사의 주소와 노스 스트라스필드에 있는 미셸의 집 주소를 몰랐다. 페이스북에 미셸의 풀네임을 검색해 보면서 미셸이라는 영어 이름을 쓰는 중국 여자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미셸이 몇 살인지, 뭘 보면 좋은지, 어쩌다 중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을 오게 된 건지도 몰랐다.

    호주를 떠난지 반년이 넘었다. 그동안 미셸과의 채팅창에 주인 없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하고, 오며 가며 만났던 미셸의 지인들에게도 연락을 취했지만 아직 아무런 답을 받지 못했다.

    중국은 인스타그램 접속이 제한된다고 들었다. 미셸이 좋은 일로 가족을 만나러 중국에 갔다가, 더 좋은 일이 생겨 눌러앉아서 인스타그램 우회 접속 같은 건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바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미셸이 보고 싶다. 다시 만나게 되면 왜 자취를 감췄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그때는 미셸이 좋아하는 TV 쇼, 회사 동료 중 딱 싫은 부류, 뉴질랜드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과 올해 비비드 시드니 행사, 유이·티나와 함께 갈 발리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