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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
새가 날아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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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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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다혜
하루에도 수많은 텍스트를 접하지만, 마음을
당기는 글과 그 글에 비치는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여운은 특히 길다.
애정을 갖고 정기구독하는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서 자족하는 삶, 숫자
너머의 세상과 사람에 대해 말하는 부부의 글을 읽었을 때가 그랬다.
이들은 매일 새벽 구운 빵과 커피, 책이 함께 있는 공간 ‘오늘과 내일’을
운영하고 있었다. 자족과 검소함, 소박함을 말하는 것이 어느새 불온하거나
불편한 것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적게 벌면서 이웃과 어울려 사는 삶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이 용기 있다고 생각했다(나중에
듣기로는 실제 그 글에 대해 불편함을 표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에 연천에 있는 그곳을
남편과 함께 방문하게 되었다. 접경 지역의 평범한 단독주택에 카페와
책방, 게스트하우스, 부부가 사는 공간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빵과 커피,
책을 한아름 사서 카페 구석 소파에 웅크린 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딜 가든 낯선 사람에게 편하게 말을 거는 남편이 오늘과
내일에서 빵을 굽고 책방을 꾸리는 인턴님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던 찰나, 역시나 생전 처음 온 동네에서 누리는 익명성의 유익을
깡그리 날려버리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복음과 상황에서 두
분 글을 읽고 여기 오고 싶다고 해서 오게 됐어요. 제 아내도 거기에 글도
쓰고 인터뷰도 했거든요.” “어머 정말요? 아내분이 누구세요?” 커피를 볶고
내리는 사장님의 호들갑스런 말소리까지 들렸고, 더이상은 모른 척할 수
없어 읽던 책을 내려놓고 인사를 하러 갔다. 두 분은 얼마 전에 지면에
실린 인터뷰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처음 본 나에게 안아봐도
되냐고 묻더니 크게 꼭 한참을 안아줬다.
사실 그 인터뷰는 고민을 꽤 한 후에 응한
것이었다. 몇 차례 기고글을 썼던 연으로, 내가 맡고 있던 어느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사적인 내용은 최대한 자제하고
내가 수행하는 사건과 활동 자체를 다루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당시 나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어서 죽은 산업재해 피해자
유족의 변호사로서, 안전조치를 하지 않아 사망사고가 발생하게 한 회사와
임원, 관리자들에 대한 형사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고인은 입사한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은 하청업체 소속 청년 노동자였기 때문에, ‘위험의
외주화’의 야만적인 단면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었다. “우리가 고용한
사람이 아니라서 책임이 없다”는 원청과 “모든 기계, 설비가 원청의
것이어서 우리가 안전조치를 할 수 없다“는 하청이 제각기 책임을 부인하는
상황이었고, 수년째 이어지던 재판에서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무리해서
하다가 혼자 죽은 사람처럼 고인을 취급하는 피고인측 변론이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고 있었다. 공항에서 수하물 옮길 때도 쓰는 컨베이어벨트가
뭐가 위험하겠냐며, 발전소는 하나도 위험하지 않은데 고인이 왜 죽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회사측 변호인의 말이 방청석에 앉은 유족과 동료들을
무너뜨렸다.
소송은 어떤 사건이나 분쟁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민사든 형사든 사건이 발생한 시점과 소송이
판결로서 마무리되는 시간은 한참 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도 피해자가 사망한 것은 2018년이었는데 1년이 넘는
수사를 거쳐 3심까지 재판이 진행되었고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판결이
선고된 것은 2023년의 일이다. 사건을 맡는 내내 2018년의 죽음을
생각했다는 말이다. 고인이 사망 직전까지 부모와 동료, 상사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낯선 업무와 위험을 호소하던 대화, 갓 배운 대로 석탄을
이송하는 컨베이어벨트 곳곳을 점검하며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들, 회사들이
위험을 보고 받고도 묵인하고 방치해 온 증거들을 보고 또 봤다. 동일한
원인으로 죽거나 다친 노동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고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수습한 후 고통 속에 병들어버린 고인의 사수, 더이상 세상에
없는 아들을 위해 투사가 되어야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고
서면으로 토해내 법원에 제출했다.
그 시기 나의 어딘가에는 항상 슬픔이 찰랑찰랑
차 있었다. 수많은 죽음을 겪고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정부와 회사와
법제도, 내 일이 아니라는 듯 별일 없이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가
일기도 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슬픔이 분노를 압도했다. 분노는 업무의
원동력이라도 되지, 슬픔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서 자꾸 일에 제동을
걸었다. 서면을 쓰다가 울고 증거기록을 살피다가 통곡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나의 슬픔이 내 변론에 귀 기울이지 않는 근거가 될까 봐 이를
악물고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출근하며 집을 나선 후 돌아오지 못하는 생(生)이
하루에만도 여럿인데, 죽음을 곱씹으며 일을 한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슬픔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사건과 주장과 법리와 판결만을
줄기차게 입에 올렸다. 분노와 한탄, 절망을 몸 한 켠에 단단하게 지닌 채
수행한 소송이 그동안 꽤 있었지만, 무기력하게 반복되는 일터에서의
죽음을 직접 앞에 두고 말하는 사건은 유독 축축하고 무거웠다. 그래서인지
빵 냄새가 솔솔 나는 따뜻한 그곳에서 나의 슬픔을 단박에 알아봐 준
사장님의 품에 안겨서 또 울 뻔했다. 인터뷰에 전혀 담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슬픔의 자리를 들킨 것도 같아 민망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단골이자 친구가 되었고, 못 견디게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고 싶을
때 짧은 여행을 나서는 심정으로 종종 연천을 찾는다. 크게 파하하 웃다가
순식간에 눈이 그렁그렁하기도 하는 이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 나면 나도 내
감정을 어느 정도는 기꺼이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귀가하는
것이다.
어느 날 사장님과 인턴님은 같이 새를 보러
가자고 했다. 두 분이 가끔 탐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시간도 안
났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고통과 슬픔을 덜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쓸모가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해온 바로는 딱 그만큼만 일상이 수월해졌다. 이 정도로 좁고 팍팍한
인식을 가진 나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새를 관찰하고 탐색하는 행위의
의미를 아직은 헤아리지 못한다. 머릿속을 날아다닐 다른 생각을 잠재울
자신도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 앞에 놓인 사건을 바라보는 슬픔과
불안을 딛고 조금은 홀가분하게 낯선 새를 보러 가고 싶다. 쓸모없는 낯선
자리로 나서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