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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백권주행(독서모임) 1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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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도서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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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이
책의 시작부터 숨이 턱 막힌다.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있다. 긍정적인 의미는 작가는 미쳤다. 부정적인 의미는 내 표현과
이해의 한계가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진작 제대로 된 표현 좀 쓸걸.
“좋다, 나쁘다. 헐. 미쳤다.”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서글프다.
신형철은 인간이 행동하고 말하는 존재이며, 그
말과 행동이 형편없는 불량품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문학은
불가피하다고.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앓기, 읽기, 쓰기, 살기』에서
메이는 말한다. 언어는 그것 자체를 담지 않는다고.
모든 발화는 실패이며 불완전하고 열등한 판본 만들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중요한 건 언어는 '그것'이 내 안에만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말과 행동의 존재로 그것이 우리 사이에
있게 한다. (131p)
불완전한 말하기지만, 그저 생각으로 소진되지
않도록 책을 읽고 느낀 소감을 나눈다.
책은 이제 불가피함의 문학에서부터 나아간다.
“그날그날의 효율을 위해 이 질문을 건너뛸 때 우리의 정치, 행정, 사법은
개살구가 될 수 있다.”라고.
한국에서 테두리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이
물밀듯 떠오른다. 지난해(2024년 기준) 질병과 사고를 합쳐 재해로 사망한
사람들은 2,098명이다. (질문을 건너뛰어) 법의 테두리를 비켜 간 여성
폭력 피해자들은 어떠한가. 2024년 기준 친밀한 관계의 남성(전·현 애인,
전·현 남편 등)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뻔한 여성은 15.8시간에
1명이다. 일면식이 없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살해될 뻔한 여성은
2일에 1명이다. 여기 (기삿거리조차 되지 않는) 사람 이외의 존재도 있다.
효율과 성장, 진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훼손되는 자연과 비인간 동물.
한 문장으로 뭉뚱그려 포함하기에 그 피해가 너무 방대하다. 죄책감이란
표현은 너무 게으르다. 우리는 늦었지만 질문해야 한다. (신형철의 말을
빌려) 그렇기에 문학은 불가피하다.
이 불가피한 문학을 쥐고 어떻게 해야 할까. 탈북
난민을 그린 강영숙의 『리나』를 살펴보자.
우리는 흔히 탈북 난민들이 원하는 바를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다고
믿고, 그들을 '자유 남한'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입장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35p)
일상에서도 이런 것들이 있다. 주어만 바꿔서
넣어보자. 장애인, 주거 취약 계층, 아동·청소년, 이주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확실한 믿음은 위험한 생각으로 변질된다. 우리(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보호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계를 만든다. 그러나 (내가 아닌) 타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라는 질문은 아직도 어렵다.
신형철은 다시 한번 질문한다. 어떤 '문학’, 어떤
'유물론'이어야 하는가? '똥 싸고 오줌 누는 몸'과 대면하는 유물론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고 단번에 이 책이 떠올랐다. 지
쪼대로 '아플 자유'를 외치는 불만 많은 암 경험자 '김도미'가 쓴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 잔의 자유』다.
이 책의 1부는 암 경험자로 투병 중 목격하거나
생각한 것에 대해 다뤘다.
생판 처음 본 고객님이든 사랑하는 가족이든 간에 먹이고 입히며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은 때 되면 처리해야 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53p)
먹고 자고 배설하면서 살아가는 두 유기체가 접촉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오염, 그것이 섹스의 본질일 수 있다. 조금의 침범과 더럽힘
없이 타인을 만날 방법은 없다. (75p)
이 두 책을 놓고 보니 배설과 오염은 인간의
'필요조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하도록
이루어져 있는 것. 어찌해서인지 아침에 일어나 청소기를 돌려도 오전
11시를 기점으로 머리카락의 무덤이 산을 이룬다 싶었다. "사는 건
냄새나는 비듬이나 오물 같은 배설을 동반한다."라는 동의어였다. 나는
오랜 기간 정신적(으로) 투병을 했다. 보호 병동에 자주 들락날락했을 때쯤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삶 그 자체의 무상함인가 했다.
그러나 내가 가장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삶의)
더러움이었다. 세상 구석구석 온갖 것들(대체로 인간에서 비롯되는 것)이
더럽게 느껴졌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결국 내가 혐오하고 있었던
건 '나' 자체였다. 그러니 살고 싶지 않은 것으로 귀결되는 것. 지금은
건강히 제철 음식을 먹고, 여름엔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자연히 여기게
되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작가는 한국 사회의 경향
중의 하나로 '정치에 대한 거부'를 꼽았다. 마치 정치 같은 것은 본래
없었다는 식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에 대항할 방법으로 '고통'의
'유물론'에 대해 말한다.
역설이 아닌 것은 세계가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 뿐이다. (아도르노)
고통은 보수와 진보의 너머에 있고 어쩌면 그 고통에 가닿는 길도 보수와
진보의 너머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여전히 유물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고통의 유물론이어야 한다. (61p)
2007년에 쓰인 책에서도 말한다. 우리가 고통을
해결하거나 그것에 가닿는 방법은 보수와 진보의 너머에 있다고. 2025년의
우리의 모습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책임은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모호한 것들은 '살아갈수록'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뒤섞여 있는
것이며,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것들을 분별해서 말할 수
없기에. (『토기』,79쪽, 45P)
책을 읽고 이해가 안 되어 들여다보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나 다음 내용이 기대되어, 또다시 읽는다. 오라 몰락의
에티카여, 오라 좌절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