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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지막,
그리고 계속하는 삶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 말라며 큰소리를 치고 독립을 선언했지만, 개업을 준비하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망할까봐 걱정한 것은 아니다(사실 아주 조금은 했다). 사무실 운영에 치여 평소라면 정말 하고 싶지 않았을 사건도 맡게 되는 상황이 가장 무서웠다. 노동을 통한 밥벌이라는 명분도 충분하니까. 노동조합 법률원에서 일한 8년과 국회와 환경단체에서 일하던 시기까지 모두 10년이 넘는 시간을 통틀어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원하지 않는 일을 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운이 좋았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법원 근처나 시내 중심가가 아닌, 내 ‘나와바리’(적절한 다른 표현을 찾지 못했다)에 사무실을 꾸렸다. 그것도 대로변이 아닌 차량 진입이 안 되는 골목길 작은 건물 1층에. 선택할 수 있었던 좀 더 안정적인 옵션과 합리적인 제안도 못 본 척 한 채 동네에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나를 염려하는 마음에 칭찬인지 꾸지람인지 헷갈리는 말을 보태기도 했다. 매번 설명을 하기도 그래서 빽빽하게 개업인사를 써서 돌렸다.

    “이곳은 학창시절부터 약 20년간 제 삶터가 되었던 동네입니다. 언젠가 여기서 일터를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웃들의 응원과 도움으로 마침내 그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하는 크고 작은 움직임을 이곳에서 만들어가려 합니다. 소박한 공간에 많은 삶이 오가며, 작지만 넓은 세계를 이루길 바라고 있습니다. (중략) 개업선물 팁. 혹시나 모를 고민을 덜어드리고자, 묻지 않으셨지만 굳이 팁을 드립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워커홀릭입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 쌓이는 매 순간을 아낍니다. 함께 도모할 '사업'이나 저에게 넘겨주실 '일거리', 저를 적임자로 딱 떠올린 '사건'이나 '연구', '회의'가 있다면 제게는 그것이 바로 선물입니다.”

    너무 비장하게 읽히는지 지역구 출마선언문으로 읽는 분들도 있었는데(정말 아니다!), 나름 광고글을 쓴 거였다. 나 여기 있고, 일을 많이 달라. 그런데 아무 일은 아니고 저런 일들을. 나와 나의 지난 활동을 아는 이들에게, 소속과 명함이 바뀌었지만 나는 그대로 있으니 연락 달라는 SOS를 친 것이었다. 개업 후 1년 반이 지난 지금 평가하기에 이는 꽤 성공한 광고였다.

    “변호사님, 바쁘신가요? 부탁드릴 사건이 하나 있는데.“

활동을 하며 수년간 알아 왔고 여러 번 협업을 해온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선생님이 내 개업인사에 첫 반응을 해왔다. 사무실에 필요한 물건을 세심하게 골라 이미 개업선물로 보내신 후였다. 사건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듣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다. 몇 주 전쯤 베트남 이주노동자 과로사 사건을 맡아줄 변호사를 찾는 활동가의 글을 어느 단체대화방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있는 대화방이어서 읽고 지나치고는 잊고 있었다. 이후 몇 명의 손을 거쳤지만 마땅한 변호사를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통로로 다시 내게 온 것이다.

    솔직히 처음엔 고민을 좀 해보겠다고 하고 거절할 시간을 벌어야 하나 싶었다. 언어도 장벽이었고 미등록 이주노동자 사건이라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입증이 쉽지 않아 보였다. 과로사는 사고로 인한 사망에 비해 소송 진행에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할 수밖에 없는데, 남겨진 배우자와 갓 태어난 아이에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사무실 개업하고 며칠 만에 수임하는 첫 사건이 무료 수임 사건이라니, 그야말로 혈혈단신 모험적인 개업을 한 탓에 마음이 꽤나 졸렸다. “관련 소송 경험이 많고 ○○사건도 수행해보신 박변호사님이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변호사님을 추천했어요.” 이런 말을 듣고 거절할 수 있을까. 변호사가 된 이래 그만큼 한가한 때는 그 이전이든 이후든 없었다. 더욱이 하지 않을 명분이 없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사건인데 소위 돈이 안 되는 사건이라고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나. 칭찬에 약한 인간이라 약간은 우쭐해진 마음으로 상담 날짜를 잡았다.

    첫 상담에서 내가 간과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주노동자 사건을 처음 해본다는 것. 노동 사건, 산재 사건은 많이 해봤고, 다들 이기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던 과로사 소송에서의 승소 경험이 있는 것도 맞지만, 이주노동자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은 아니었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을 제한하지 말라는 헌법소원 대리인단으로 참여한 적이 유일하게 있긴 했다. 다만 여러 명의 대리인이 역할분담을 하면서 법리적인 검토만 맡았기에, 청구인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들과 소통하며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예상대로 어려웠다. 일단 약속을 잡는 것부터 난코스였다. 동료 노동자들과 약속을 했다가도 미뤄지고 취소되는 일이 계속 발생했다. 직접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애초에 무리한 일정을 잡아서인지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인 것인지 상황의 뉘앙스조차 알기 어려웠다. 어렵게 찾아가 만나도 한국어로 했으면 1시간도 걸리지 않을 상담이 평소의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서의 차별받은 경험 탓인지 동료들은 소송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용기를 내 나온 자리에서도 온전한 진술을 받아내기 위한 긴 설득 과정이 필요했다. 경험한 사실을 말하는 것임에도 정부나 법원이, 또는 회사가 불이익을 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적법한 체류자격을 갖고 있는 이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마찬가지였다. 건설현장에서 쓰는 현장의 언어는 한국어로도 낯설었고 일본어가 섞인 비공식적 용어가 많아 전달하는 것도 어려웠다. 다행히 처음부터 계속 유족을 지원하고 있던 이주민센터 대표님이 동료 노동자들과의 모든 연락과 진술 통번역을 맡아주셨다. 이해가 어려운 현장 언어와 실태는 건설노조 국장님에게 묻기도 했고, 여러 언론인들이 취재해서 쓴 건설현장의 불법 하도급 관행과 위험한 속도전 등에 대한 기사들을 통해 전체적인 구조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관계는 이랬다. A는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철근공이었다. 철근을 옮기고 자르고 구부리고 배치하고 엮고 하는 일들을 했는데, 대표적인 노동강도가 높은 작업이었다.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공공연하게 존재하는 다단계 불법 하도급 구조의 맨 밑바닥에서 작업 ‘평당’ 정해진 임금을 받았다. 출근 첫날 부르는 곳으로 따라가 근로계약서에 서명은 했지만, 거기에 적혀있는 출퇴근 시간, 임금, 휴일 등 근로조건은 현장에 극소수만 존재하는 정규직에만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A와 동료들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인 팀장이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 일러주는 대로 출근해서 일했고, 몇 시가 되었든 주어진 일을 다 마쳐야 퇴근할 수 있었다. A는 이전까지는 ‘시간당’ 임금을 받는 철근공으로 일을 했었다. 얼마 전 딸이 태어나면서 불안정한 체류자격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위해 작업 ‘평당’ 임금을 받는 팀에 합류했다. 할당된 작업량을 채우면 그 작업량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일. 대신 더 오래 일하거나 훨씬 높은 노동강도를 견뎌야 하는 일. 더 위험하고 고되지만 돈은 상대적으로 좀 더 벌 수 있기에, 이를 버텨낼 수 있는 어리고 젊은 이주노동자들로 채워진 팀. 건설현장에서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 널리 활용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지하에서 까고 지상에서 남긴다.’ 이주노동자가 주로 일하는 지상에서 이윤을 챙긴다는 건설 현장의 말이 가리키는 지옥도의 끝자락, 그곳이 A의 일터였다. A는 사망일 오전 작업 속도와 강도를 견디지 못하고 여러 차례 주저앉다가 중간에 귀가하고 싶어 했지만, 자신이 일을 하지 않으면 동료들이 더 힘들어진다는 팀장의 말에 현장으로 복귀했다. 잠시 후 A는 의식을 잃으며 쓰러졌고 그것이 그의 삶 마지막 순간이었다.

    산재보험을 운영하는 근로복지공단은 재해조사 과정에서 이런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않았다. 시공사인 원청이 제출한, 잘 꾸며진 서류만을 근거로 A의 과로에 대한 주장을 믿지 못한다고 했다. 근로계약서에 적힌 대로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며 힘들지 않은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정작 근로계약서는 한글로만 쓰여져 A와 동료들은 읽을 수조차 없었고, 계약서 ‘갑’란에 있는 회사 이름은 소송을 하기 전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조사 권한도 없는 유족과 활동가, 변호사가 수소문 끝에 만나서 들을 수 있었던 이주노동자들의 진술을 근로복지공단은 애초에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서류에 쓰인 것만 믿었다. 서류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과 세상이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는 듯했다. 국가가 누구의 말을 듣고, 무엇을 신뢰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소송에서 재판부는 동료 노동자의 증언을 직접 듣겠다고 했다. 이를 ‘다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모든 소송이 이렇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려깊은 재판부를 만난 것은 분명 다행이었다. 변론을 통해 근로복지공단의 근거가 빈약하고 조사가 부실했음을 보여주자, 서류가 담지 못하는 다른 진실이 있음을 이해한 것으로 보였다. A의 죽음에 부채감을 느낀 동료 한 명이 법원에 출석해 증언을 하겠다고 결심해주었다. 사람이 죽었는 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면 안되는 것 아니냐고 내게 묻던 이였다. 많은 이들의 수고와 노력 끝에 A의 마지막 시간의 실체를 마침내 법원에 들려줄 수 있었다.

    예상한 대로 힘들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도움을 받아가며 1심 판결을 받았고, 이겼다. 판결이 선고된 시기가 계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잠시나마 이 일로 기뻐할 수 있어 너무나 고마운 소식이었다. 동시에 이번 사건이 얼마나 이례적인지 알게 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갑자기 사망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늘고 있는데, 산재 신청까지 닿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얼마나 죽고 있는지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소송을 진행하며 알게 되었다. 전국에 이주노동자 없이 돌아가는 건설현장이 없는데, 존재해서는 안되는 불법 하도급 구조 하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 회사와 허위 계약서를 쓰거나 그조차도 쓰지 못한 가리워진 존재가 많았다. 노동의 실체를 숨긴채 숨만 쉬며 살아야 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게 우리 곁에 있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과로 산재 인정이라니, 반가운 소식이라는 반응을 여기저기서 듣는 심정은 복잡했다. 부고를 쓰는 마음으로 완성한 이번 소송은 분명 보람 있었지만, 근로복지공단의 부실한 재해조사의 문제는 여전했다. 이주노동자 사건에서의 차별적이고 선택적인 진술 청취 문제도 시정되지 않았다. A의 사건에서도 법원의 판결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뒤늦게 산재 승인을 했을 뿐 근로복지공단은 유족에게 유감을 표하거나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이주노동자가 소송까지 갈 여력이나 기회가 없다는 점에서, 이 한 건이 특이한 사례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한낱 평범한 변호사가 할 수 있는 게 달리 있겠나. 다른 사건 여러 건을 더 맡았고, 여전히 힘들어하며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개업 첫 달이 지나면서 급증하는 업무 탓에 스스로 만들어낸 쓸데없는 고민은 까맣게 잊혔다. 생존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흔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기껏 사무실 하나 운영하면서 살아남아야 한다느니, 생존이라니 감히 엄살을 부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을 하고 있으면 된다. 감사하게도 더이상 저런 SOS는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일은 엄청 많다. 오해를 막고자 덧붙이자면 대부분의 사건은 노동의 대가로서 책정된 적절한 수임료을 받고 있고, 일반적인 사건도 (골라가며) 하고 있다. 작은 사무실을 운영하는데는 그렇게 큰돈이 들지 않고, 먹고 사는 일도 거창한 자본을 요하지 않는다. 버는 만큼 먹고 필요한 만큼 벌면서 ‘소박할 마음’만 잘 간직하면 된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결심만 지키면 된다. 그래도 한가지 욕심을 내자면, 하고 싶은 사건, 마음이 동하는 사건이라면 돈과 상관없이 아주 약간만 고민하며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되면 좋겠다. 조만간 개업 2주년 인사를 한번 또 돌려야 하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