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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차이를
찾아내는 비평

    문학이란 모름지기 불온하고 전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형식을 실험적으로 해체하고, 단일한 주체가 없으며, 복잡한 이미지가 혼재된 신세대 시인들의 시는 매혹의 대상이었다. 2010년대 초반 문학을 좋아하던 또래 학생들 사이에서도 미래파라 호명되던 김경주, 황병승 등은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시인들로 여겨졌던 것 같다. 반면 전통적인 서정시 계열의 시는 의미가 단순하거나, 낡았다고 여겨지며 거리 두는 경향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편협함은 일부 기성 문인이나 독자들이 ‘미래파’, ‘뉴웨이브’라 명명된 시인들의 시를 두고, ‘난해시’라 단정 짓던 인식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으면서 록 음악에도 조예를 갖춘 것이 모순적이지 않듯, 시에 접근하는 태도 역시 한 극단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 핵심은 기존 서정과 뉴웨이브 중 무엇을 옹호해야할지 양자택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서정’, ‘어떤 뉴웨이브’인지 판단하는 안목에 있을 것이다. 예컨대 신형철은 「보유 - 시인들이 거기에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통해 황병승, 김민정 시인을 두고 "폭력과 섹스로 범벅이" 되어 있다거나, "지나치게 난해한 구문으로 얽혀" 있다고 비판했던 한 중견 문학평론가에게 이런 반론을 펼친다.

    “문태준의 시를 옹호하기 위해서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을 ‘서브포에트’로 격하할 필요가 있을까? 없다. 문태준이니까. 문태준에 대해 잘 말하기 위해서는 그를 그와 다른 경향의 시인들과 대조하기보다는 유사한 경향의 시인들과 비교하는 편이 낫다. 그는 탁월한 시인이다. 그저 서정시의 문법을 유려하게 반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얼핏 유사해 보이는 수많은 서정시들 중에서 그만이 갖고 있는 작은 차이 때문이다. 왜 그 차이를 ‘서브포에트’들에게서 읽어내서는 안 된단 말인가.”(325p)

    또한 그는 자신이 반박한 비평가가 저질렀던 실수를 답습하지 않는다. 가령 「시적인 것들의 분광(分光), 코스모스에서 카오스까지」에서 도종환과 손택수의 서정시가 가진 한계를 포착한다. 관성적인 서정의 메커니즘에 따라 ‘부처’와 ‘화엄’으로 상승하거나, “세계와 내면의 난마를 충분히 앓지 않고”(256p) 쉽사리 삶을 ‘총체적’으로 진단하려는 지점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비판을 서정시 전반에 대한 폄훼로 확장하지 않고, 이어서 언급하는 김사인과 최정례의 시에서 새로운 숨구멍을 부여하고 매력적인 잉여를 산출하는 서정의 갱신을 알아본다.

    이 시선은 자신이 뉴웨이브라 명명한 시인들을 응시할 때도 유효하다. 김경주의 시가 ‘1인칭 화자의 고백’이라는 서정의 메커니즘을 수용하면서도 과잉된 ‘감각의 논리’로 관습적인 지각작용(perception)이나 상투적인 감응작용(affection)에서 벗어난다면, 이민하의 시는 “주체도 대상도 없는”(371p) 이미지들의 말놀이를 통해서 깊은 상처를 은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계통 없는 헛것들(simulacre)을 통해 위, 아래, 뒤가 갖는 깊이와 원근감을 배제한 채 ‘옆’에서 “있는 그대로”(355p) 낯설게 만드는 감각을 김행숙에게서 읽어낸다.

    신형철은 ‘작은 차이’라고 표현 했지만, 그의 섬세한 시선을 거치고 나면 독자는 한 덩어리로 막연히 뭉뚱그려지던 시 세계가, 각기 다른 ‘결정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한편 산문으로 시를 쓰는 것처럼 비평이 유려했기에, 해석 과정에서 드러나는 평론가의 육성에 한동안 마음이 머물렀다는 고백 역시 빠뜨릴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