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둥...
무미건조한 나의 등장이다.
내가 록 음악을 듣는 건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뭔가 안 어울리잖아?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아주 작은 소리로 듣는다. 몇 번은 이어폰을 빼서
밖에 소리가 들리나 확인했던 적도 있다.
비둘기에게 버리려 했던 빵조각을 조금씩 떼어 준 적 있는데 이후로
비둘기가 계속 따라와서 바쁘게 걸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쫓아왔다. 무시할 때마다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주워 먹을 게 없어
땅바닥을 쪼는 비둘기 부리가 되어 콕콕 찔렀다. 그러게 누가 기대하래.
나한테 함부로 정 붙이지 마!
어른들은 바쁘다. 엄마는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에 쏟아지는 알람을 듣고
겨우 일어났다. 커피를 타면서 동시에 내가 마실 두유를 꺼내주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며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식탁 모서리에 허벅지를 쾅 박고
잠깐 그 자리에 멈춰서 쓰라려했다. 나도 전에 거기 부딪혀서
멍들었었는데... 금방 또 가방을 챙기더니 잘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도어락이 잠겼다. 오늘은 학교 가고 싶지 않다고 말도 못했다.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 걷다가 멈춰서서 가방에 든
텀블러를 꺼내 뚜껑을 같은 방향으로 꽉 돌렸다.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해야
한다. 전에 가방을 전부 적신 적 있기 때문이다. 그때 하필 아끼던 책이 그
안에 있었는데 한 번 울어버린 책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볼 때마다
속상해서 그날 버렸다.
화가 나면 어떻게 하냐고.... 그냥 혼자 가만히 있는다. 왜냐면, 화를 내면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지니까. 참는 게 낫다. 할 말이 있어도 잘 안 나온다.
다물어진 입이 움찔거리다가 만다. 매번 주변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나
자신이 좀 개 같이 느껴졌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떻지? 깜깜한 휴대폰
화면에 비친 나의 모습은 참으로 평범하게 생겼다. 표정조차도 평범하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 끝내 말하지 못하고 입안을 맴돌다 용해된
말들이 늘어간다. 그럼에도 어딘가에 남아는 있을 것이다.
언젠가 가보려고 했던 집 앞 카페가 문을 닫았다. 사람 없어 보이더니
결국엔... 아마 카페 안에 있었을 책이 길거리에 놓여있어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지만 억울한 마음에 집어 들었다. 내 맘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집에 왔다. 내 방 서랍 깊은
곳에 들어가라 했다. 서랍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저렇게 두고 언제
읽을진 모르겠다. 너무 어려운 책을 집은 것 같아 후회도 된다. 벌러덩
누웠더니 아무 것도 없는 천장이 시야에 가득찬다. 눈을 뜨는 거나 감은
거나 차이가 없다. 먼 미래의 내가 읽어주겠지, 아마도.
언제 한번 아침에 휴대전화를 제출하는데 노래를 안 끄고 내는 바람에 그걸
김사과가 흘끗 본 것 같다. 모르겠지? 하필 들킨 대상이 김사과라서 교실
한복판에서 큰 목소리로 어울리지 않는 나의 취향에 대해 떠들어댈까 봐
걱정이 됐다. 그냥 넘어가길래 못본 줄 알았는데 며칠 뒤 사과가
디엠했다.
야, 너도 이 밴드 알아?
당연하지...
이름이 사과라니 웃겨. 둘 다 지각하는 바람에 반을 대충 쓸고 있었다. 또
더러워질텐데 뭐 하러 닦는 걸까? 사과는 듣는 사람이 딱히 주목하지
않아도 자기 얘기를 줄줄 잘만 했다. 엄마가 자기를 임신했을 때 태몽에
연두색 아오리사과가 나왔단다. 그래서 이름도 사과. 막상 자기는 사과
알레르기가 있다는데, 절대 비밀이라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긴
빗자루로 바닥 먼지를 모으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걸 어떻게 숨겨?
커텐이 일렁거렸다. 마침 나도 오늘 아침에 사과를 먹고 왔는데. 엄마는
사과를 건네며 껍질 째 먹어도 된다고, 아침에 먹는 사과는 황금과 같다고
말했다. 사과는 다른 과일과는 다르게 먹을 때마다 입안이 따끔거렸다.
어쩌면 나도 알레르기가 있는데, 모를 수도 있는 건가?
사과는 우리반의 그 누구보다 목소리가 크다. 특히 누가 반칙하는 걸
발견했을 때 고함을 지르는데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수업 종 치자마자
점심을 항상 뛰어가서 일등으로 먹고 제육볶음은 꼭 한번 더 받아먹는다.
엄청 많이 먹는데 또 그만큼 많이 움직여서 그런지 나보다 말랐다.
남자애들이 독차지하던 운동장 한켠을 자기 영역으로 만들더니 여자
축구부까지 결성한 아이. 언제나 운동장을 지키고 있어서 피부가 햇빛에
그을려 까무잡잡하다. 그런 사과는 속살이 하얗고 아삭하다기보다 까맣고
단단한 조약돌 같다. 그에 비해 나는, 다같이 합창할 땐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 입만 벙긋대고 말아버린다. 사과는 립싱크하는 나를 흘끗 보더니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 어떤 것에도 열심이지 않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직접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안다. 그런 사과에게
비밀을 말해주는 척 입을 열었다.
너를 둘러싼 모든 세상이 가짜라고 생각해봐. 그럼 내 마음이 이해가 갈
걸?
그 말을 들은 사과는 처음으로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버스가 덜컹덜컹 움직인다. 버스 아저씨가 맞은편에서 오는 버스에 인사할
줄 알았는데 오늘은 하지 않았다. 손을 들지 못한 거야? 이제 친구가 아닌
거야? 언제부터?
멍 때리다 버스에서 내릴 때가 됐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때마침 신호가
걸려 그 자리에 멈췄다. 그런데도 왠지 이미 늦었단 생각에 벨을 누르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 정도의 순발력도 없는 것이다. 신호가
끝날 때까지 아무 내색도 할 수 없었다. 다음 정거장에서야 겨우 벨을
누르고 내릴 수 있었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가방을 추키고 돌아가는 길에
이럴 때 사과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여기서 내릴게요! 외쳤겠지. 그럼 문이 열렸겠지. 엄마가 사준 신발을
신었는데 새끼발가락이 빨갛게 부어올라 물집이 잡혔다. 이대로는 멀리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나는 곧 이사를 가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다 사라질 예정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런 거 한 두 번도 아니고, 어차피 나중 되면
기억도 안 날 테니까. 초등학생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사를 씹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나를 빼고 넷이
다니기 시작했다. 그날 급식을 혼자 먹었는데 같은 공간에 있는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속닥거리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입맛이 없어서 다 버리고
나갔다. 운동장에서도, 도서관에서도 그 애들은 없었다. 이사 가는
날까지도 나를 모른척했다.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른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니까 잘해줄 필요 없는 거겠지. 엄마 말처럼 전학간다고 미리 말하지
말 걸 그랬어. 상처받기 두려워서 잠시 기둥 뒤에 숨었다가 연서, 시안이,
준호, 우진이가 나란히 집에 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평소와 똑같은데
그들을 지켜보는 내 기분만 달랐다.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방 을 고쳐
맸다. 그날은 엄마의 생일이었다. 모처럼 불을 밝힌 케이크 앞에서 축하
노래를 부르는데 웃음이 잘 안 났다. 그때 빌었던 소원은 뭐였을까? 지금은
이뤄졌을까?
이전 학교를 떠나면서 문득 했던 생각이다. 지금까지 나한테 사과한 사람은
없는데 이제는 누구에게라도 사과를 받고 싶다.
엄마에게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다고 말했다. 한 두달 정도 고민하다가
겨우 꺼낸 말이었다. 지금 머리 잘 어울리는데 왜 그러냐는 대답이 바로
나온다. 그럼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왠지 엄마 눈을 바라보기가
어려워서 허공을 보며 말했다. 그냥, 덥잖아. 엄마는 그게 뭐냐고,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날 바로 미용실에 가서 사과랑 비슷할 정도로 머리를 짧게 잘라버렸다.
엄마가 이렇게 잘라도 된다고 하셨어? 미용사 분이 이미 잘라놓고 뒤늦게
걱정하는 투로 물어봤다. 네. 뻔뻔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거짓말을 한다.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진 머리카락들이 보였다. 좀 전까지 나와
연결되어있던 길고 수북한 털들. 이건 엄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머리카락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잖아. 혼날까봐 걱정도 됐지만 가벼워진
머리만큼 마음도 홀가분하다.
벌써 금요일이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나는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체육 시간. 약간은 겉이 물렁한 배구공을 손목으로 튕기는 중이었다. 잘
치지 못하고 있자 선생님이 내 어깨를 꾹 잡았다.
지금 여기 힘 들어가 있지?
힘 빼.
항상 힘주고 버티는 것만이 정답은 아냐.
가끔은 힘을 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힘을 빼야 더 멀리 날아간다고...
마지막 날이니까 오늘은 꼭 미래랑 같이 가야겠다며 친구들을 따돌리고 온
사과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너 떠나서 속상해.
자주 연락해. 별 일 없어도 그냥.
알겠지? 읽씹하면 찾아갈거야.
사과답다. 못 이기는 척 알겠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그거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
사과에게 슬쩍 스티커를 내밀었다. 못 주면 어쩌나 했는데. 별 거
아니지만... ‘참 잘했어요’라고 적힌 초록색 사과 모양 칭찬 스티커를
받아든 사과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 잘했어?
어, 뭐,,, 아무데나 붙여.
고마워.
부끄럽지만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 건 처음이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답답한지도 모르고 살다가 사과를 만나고 알았다.
다른 방식의 삶도 있다는 걸. 매번 힘주어 참으며 지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그걸 알게 된 순간은 창문을 크게 열고 신선한 공기를 흠뻑
들이쉰 것 같았다. 바깥공기가 마음을 가득 채웠다.
며칠 후
사과에게 간만에 디엠이 왔다.
사진 한 장이었다.
[미래철물]
동네 낡은 간판 사진...
나도 한입 베어문 사과를 보냈다. 여전히 입안이 까끌거렸지만,
참을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