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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말들

    나에게 영어 알파벳을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은 고모였다. 미술을 전공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던 고모가 가끔 집에 와서 나와 동생에게 미술을 가르쳐 줬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을까, 아직 알파벳을 모른다고 하는 나를 붙잡고 줄 노트에 대문자와 소문자를 차례로 그리게 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것(당시에는 초등학교 정규 교과과목에 영어가 없었다)을 굳이 먼저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엄마는, 고모가 나선 것을 불편해했다. 형제자매가 많은 집안의 삼남인 아빠는 본인이 받지 못한 고등교육을 받는 동생들 학비를 댔는데, 그중 한 명인 고모는 엄마 아빠의 신혼집에서 얼마간 함께 살기도 했었다고 한다. 아빠는 착하고 든든한 집안의 기둥이었고, 그런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그 집안 사람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고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 고모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고, 맥도날드라는 패스트푸드의 맛에 입문시키고, 존 레넌의 음악을 들려줬다. 자신이 아끼는 무언가를 소개할 때마다 기쁘게 반응하는 나를 뿌듯해했고, 더 많은 세계에 나를 들이며 신나했다. 분명 고모는 많은 조카들 중에서도 나를 편애했다. 미술도구로 가득 찬 본인의 하숙집에 데리고 가서 잠을 재운 조카도 나뿐이었고, 성인이 된 기념으로 손목시계를 선물한 조카도 내가 유일했다. 중국에 있는 삼촌을 만나러 가는 길에도 어린 나만 데리고 갔다. 나의 첫 외국은 그렇게 고모와 함께였다.

     스무 살 이후 혼자 서울에 살게 되면서 고모와 더 가까워졌다. 결혼한 이후 서울에 살고 있던 고모는 종종 나를 불러다가 밥을 배불리 먹이고 매번 용돈을 손에 쥐어 보냈다. 타인의 집을 방문하며 이동하는 노동에 익숙한 고모는, 매일 저녁 여기저기 떠다니며 과외를 하던 나를 구체적으로 염려했다. 고모의 사는 모습을 보고 고단한 그의 형편을 짐작했지만, 사양해 봤자 계좌에 바로 꽂히는 용돈을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자신에게 책을 빌려 읽던 아이가 어느새 커서 책을 추천하고 CD를 선물하는 어른이 된 것을 고모는 기특해했다. 미술 강의를 하던 고모는 이제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옷을 도매로 떼어다가 중국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은지 물은 적은 없다. 다만 고모는 작은 책방을 하고 싶다고, 멀고 낯선 곳들을 여행하고도 싶다고, 저 아래 묻어둔 자신의 바람들을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여전히 어린 조카에게 꺼내어 보였다. 평소 말수도 적고 표현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나에 대한 호의와 환대는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내 부모는 본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겁 없이 두리번거리는 나를 낯설어했다.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을 왜 선택하지 않냐며, 은근히 나를 채근하고 단념시키는 부모의 언어는 서럽다기 보다 피로했다. 반면 고모는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꼭 하라고, 그런 말들을 종종 했다. 당시의 나는 ‘무엇이든’이 내포하고 뿜어내는 무게를 기꺼이 여길 만큼 어렸다. 고모의 언어는 나를 추동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모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고모는 두 번의 투병을 했다. 2009년 처음 암이 발병했다. 폐암으로 수술을 했고 이후 외래진료에 몇 번 고모를 모시고 국립암센터에 갔던 기억, 정확히는 과거 이메일을 뒤지다 찾은 기록이 있다. 대학원 지도교수에게 고모 병원 모시고 가느라 수업 늦을 수 있다는 이메일을 보낸 것이 남아 있었다. 그즈음이었나, 고모가 “노무현 때 건강보험 보장범위가 확대돼서 생각보다 암 치료에 돈이 많이 안 든다”는 말을 했었다. 이후 고모가 어떻게 회복되었더라. 역시 모르겠다. 야속하게도.

     2015년 9월 추석을 앞두고 고모가 죽었다. 암이 재발해서 뇌로 전이가 되었고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라는 연락을 받고 온 가족이 같이 고모가 입원한 병원에 가서 인사를 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었다면 그날의 장면이 생생해야 할 텐데, 알아보기 힘들 만큼 퉁퉁 부어있던 고모의 얼굴만 간신히 기억에 있고 무슨 인사를 어떻게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일하느라 바쁜데 뭐 하러 왔냐는 말, 밥은 거르지 말고 꼭 잘 챙기라는 말은 그날도 고모에게 들었을 텐데. 부고를 듣고 밤늦게 장례식장에 들러 잠시만 머물다가 국정감사 보도자료를 마저 쓰러 사무실로 복귀했다. 밥 먹듯이 밤을 새우며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던 시기였다. 고모의 빈소는 한산했다. 그나마 고모의 가족, 내게는 친가 친척인 이들 몇몇이 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모였을 그들은 그날도 영정 사진을 앞에 두고 불화했다. 나는 아빠의 가족을 견디고 싶지 않아 고모의 발인에도 가지 않았다.

     아직도 집에는 고모가 준 작은 접시 몇 개가 있다. 처음 작은 부엌을 갖게 되었을 때 집에 와서 내가 갖고 있는 그릇 구성을 살펴보더니 이런 게 필요할 거라며 가져다준 접시. 이제 15년을 훌쩍 넘긴 살림이다. 앞접시로 자주 쓰는 하늘색 잔꽃 무늬의 코렐 접시는 아마도 평생 깨질 것 같지 않다. 싱크대 하부장을 열어 그 접시를 꺼낼 때마다 고모를 떠올린다. 기억나지 않는 고모의 마지막 대신, 어린 고모가 한참 더 어린 나를 붙잡고 한 말들을 생각한다. 나를 키우기도, 나중에는 뒷걸음치게도 했던 기대들. 고모의 기대와 달리, 나는 어떤 자리에는 속할 수 없는,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알려 주고 싶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게 되었다고 말하면, 고모는 으레 그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것도 좋다고 할 것이니까.

     오래도록 천천히 내 몫의 애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