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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밉지 않은

    명절엔 란마와 버스를 타고 부모님 집에 가곤 했다. 란마로서는 자동차든 전철이든 좁은 이동가방에 갇혀 몇 시간씩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반가웠을리 없다. 가뜩이나 오랫동안 뜬장에 갇혀 있던 보호소 출신이라 켄넬 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란마였다. 그치만 일 년 중 한두 번이면, 왕복 세 시간이면 못 견딜 정도는 아니잖아. 가방 속에서 란마가 헥헥 혀를 빼고 숨을 몰아 쉬면 내 가슴도 콱 조여들었으면서도, 란마를 반가워할 가족들 얼굴을 생각하면 도저히 홀로 두고 올 수가 없었다.

     아빠가 특히 반색했다. 애연가인 아빠는 십팔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비공식 흡연구역에 다녀오는 수고를 매 시간마다 견디고 있었는데, 그 지루하고 퀴퀴한 여정에 란마만은 언제나 꼬리를 흔들며 기꺼이 동행했던 것이다. 강아지 버릇 나빠지니 안된다고 말려도 아빠는 국에 든 고기 등을 몰래 식탁 아래로 건네주곤 했으므로 둘은 상부상조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부모에게 실망만 안기며 살아왔던 내가 명절에 당당히 식탁에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사하게 포실포실한 오렌지색 털뭉치를 들이밀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 모르지 않았다(미대를 나와 대기업에 가지 못하고 돈도 시원찮게 버는 자식이란 대체로 근심거리일 뿐이므로). 그것마저 란마가 애교를 부려대면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란마가 죽었다는 말에 아빠가 전화해 훌쩍였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약한 감정을 들키면 끝장인 사이인줄로만 알았는데. 몇 년간 연락을 끊고 지내다 만나도 덤덤하던 우리 가족이, 그것도 아빠가 눈물을 흘리다니. 나와 마찬가지로 아빠도 ver.3쯤으로 업데이트되어있던 것일까.

     이제와 생각해보니 추석에 맞춰 모리를 짜잔-하고 공개할까 고민했던 것도 그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나 자체로는 환영받을 만한 자식이 아니지만, 어때요 이 새로운 강아지는? 이마를 찌푸리다가 이내 모리의 붕붕 흔들리는 꼬리에 못이기는 척 웃어주는 부모. 설마 나는 이런 것을 기대하고 서둘러 모리를 데려왔던걸까. 아니, 아니지. 또 어디서 개새끼를 데려왔냐고,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냐는 탄식을 각오했었다. 호두가 죽고 란마마저 죽었을 때, 엄마는 이제 더는 짐승을 데려오지 말라고 빌 듯이 말했다. 피할 수 없는 헤어짐 앞에서 딸이 또다시 슬퍼하지 않길 바라는 걱정은 아니었다. 더이상 발목 잡힐 일 만들지 말라는, 이것 또한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다.

     란마를 귀여워하는 것과 별개로 엄마에게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바로 자기 딸이 짐승을 키우느라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어떤 주장은 근거가 모호할수록 반박하기가 어렵다. 개고양이를 키운 것과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냐 물으면 엄마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그 요상한 믿음은 예상보다 굳건했다. 저놈의 개고양이 새끼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딸이 해외에 나갈 기회도 얻지 못하고 부자가 되지도 못했던 거라고, 개고양이만 없었어도 딸은 승승장구했을 거라고 믿었다. 도대체 왜 딸이 해외에 나가길 그렇게 바라는지, 개고양이가 사라지면 딸이 어떻게 해외에 가게 되는지, 해외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길 바라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해외=성공’ 같은 모호한 계시가 엄마의 마음에 언제 꽂혔던 걸까. 정작 나는 해외 여행에 대한 욕구가 적고, 평생 모국어로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는 한국에서 살다 죽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은 엄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엄마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부족한 데 없는 딸이 큰 돈을 벌지 못했다(혹은 부족한 딸이 큰 돈도 벌지 못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엄마는 왜곡된 이야기를 엄마의 마음과 현실 사이에 알콜솜처럼 쑤셔 넣었다. 하지만 상처가 아물기 위해선 피떡이 된 솜은 다 치워버려야 한다. 호두와 째즈, 란마가 없었더라도 내가 부자가 되지 못했을 거란 사실을 엄마는 언제쯤 인정할 수 있을까. 그나마 그 셋이 있었기에 나는 꼬박꼬박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고, 꾸준히 돈을 벌 필요를 느끼는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그렇지 않았다면 될 대로 되라며 있는 힘껏 엉망으로 살았을 것을 엄마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다.

     해외에 가지 못했던 것은 내가 돈을 못 모았기 때문이고, 돈을 못 모은 것은 개고양이에게 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전부 해보느라 썼기 때문이다(돈이 많았더라면 집부터 구했을 것이다). 차라리 호두, 째즈, 란마에게 그런 돈을 써보기라도 했으면 엄마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텐데, 나는 언제나 무심하고 허술한 인간이었다. 누구든 피를 보지 않는 이상 먼저 병원에 달려가는 일은 도통 없었다.

     호두와 가족이 된 지 십 년이 넘었을 즈음에도 엄마는 고양이 어디 줘버릴 사람 없냐고 묻곤 했다. 십 년 넘게 함께 산 고양이를 버리면 딸이 행복할 것 같은지, 가족 같은 고양이를 버리고 행복해지는 딸이라면 오히려 사이코패스 검사를 시켜봐야하는 것은 아니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그런 대화를 한 뒤에 우리가 크게 다퉜던가. 호두 때문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큰 싸움 후 일 년 넘게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호두가 암 진단을 받았고, 나는 유례없이 큰 돈을 호두 치료에 쏟아 부었다. 호두가 반 년간 살아남는데 든 돈은 구백만 원 가량이었다. 엄마의 악몽이 드디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십 년 넘게 몸에 쌓인 저주가 실현되던 때를 놓쳐서 엄마도 아쉬우려나. 거봐라, 내가 뭐라 그랬어, 개고양이 때문에 돈 못 모은다고 엄마가 몇 번이나 말했냐. 하지만 엄마가 하도 그런 말을 한 덕분에 나도 한 번쯤은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야 되겠다 싶었던 거라고,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면 결과가 영 좋지 않겠지. 그때 구백만 원을 안 썼더라도 지금쯤 쓰기야 다 썼을 것이다. 나는 도통 돈을 담아두는 방법을 모른다. 나 혼자 몽땅 썼을 것이다.

     이제 모리가 성북동으로 이사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모리에 대해서 쓰려면 먼저 란마에 대해 일러둬야 할 것이 많다. 란마에 대해 말하려고 보면 호두를 쓰지 않을 수 없고. 호두를 이야기하는데 째즈를 빼놓을 수 없고. 마루도 있지.

     마루, 초등학생이던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지켜봐준 개.
     호두는 열세 살에 죽은 나의 첫째 고양이.
     째즈는 이제 열 살이 된 나의 둘째 고양이
     란마는 여덟 해 함께 살고 죽은 나의 셋째 개.
     모리, 나의 넷째 개. 아직은 강아지.

     이렇게 쓰고 보니 엄마 말대로 개고양이가 어떤 때는 내 발목을 잡기도 했을 것 같네. 이렇게 많으면야, 한 번쯤은 잡지 않았겠어. 실제로 모리는 내가 지나갈 때 바지가랑이를 물고 왕왕 당겨대니까. 그렇지만 정작 내 발목을 낚아채 넘어뜨리고 밟던 것은 언제나 집 밖에 있었고, 넘어져 우는 나를 핥아주던 것은 언제나 이 짐승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엄마, 그래도 얘네가 그렇게 미워? 나는 어떤 날엔 세상에서 오직 얘네만이 밉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