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아침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 거야. 난 그때부터 오늘의
날씨를 체크하듯 매일 아침 내 기분을 살펴. 얘가 오늘은 기분이 어떤지,
힘든지, 슬픈지, 화나는지, 짜증 나는지 슬며시 들여다 보는데, 마치 내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다니까. 진짜 어이없지. 근데 이 기분이 하루 종일
가는 게 문제야. 이러니 아침에 내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어. 아침에 기분이
좀 저조하더라도 출근길의 날씨가 좋으면, 혹은 회사 동료가 웃긴 얘기를
하면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잖아? 그런데 그 모든 좋은 일에 순간적인
웃음이 비식 나왔다가도 푸스스 사라지더라고 . 아침의 기분이 상한선인
것처럼 그 이상으로 올라가지가 않았어. 그래서 아침의 나에게 더 눈길이
갔는지도 몰라. 아침의 나를 살펴봐주고, 아침밥을 먹이고, 의자에 앉혀서
글을 쓰게 하고 . 그렇게 아침의 나를 토해 내게 한 다음에 하루를
시작하게 했어. 뭐라도 밖으로 내놓으면 마음이 좀 시원해지더라고 .
그때는 귀찮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고맙고 기특한 일이네.
2024년 5월 1일. 그냥 정신없이 일어남.
2024년 5월 17일. 또 일 생각을 하며 일어남.
2024년 6월 10일. 회사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2024년 6월 22일. 또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느낌으로 일어났다.
2024년 7월 6일. 생각 생각 생각.
2024년 8월 26일.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의 아침 일기를 보기 전에는 마음을 좀 가다듬어야해. 일어났다,
일어났다, 또 일어났다…… 수많은 일어남, 그 수만큼의 아프고 슬펐던
아침들이 박제되어 있어서. 짧은 줄글의 한글자 한글자를 쓰는 손가락이
어찌나 무거워보이던지.
작년에 네가 겪은 일을 번아웃이라는 납작한 단어로 설명하고 싶지 않아.
힘듬을 고백한 너에게 나는 번아웃을 안 겪어봐서 잘 모르겠다고 외면한
얼굴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도 않아. 대신 이른 아침 침대 옆, 또는
화장실에서 비어있는 눈으로 주저앉은 너를 기억해. 아침에 눈을 뜨기만
해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오늘 겪을 일들. 세수를 하고 씻고 옷을 입고
문을 열고 나가 지하철을 타고 역에 내리고 몇 번 출구로 올라가서 회색
건물로 들어가서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출입증을 찍으면 스르릉 열리는
자동문 소리(정말 싫었다. 이것을 넘으면 회사이므로 .)를 뒤로하고,
또박또박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 마주치는
익숙한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내 자리에 앉고 노트북을 열고 유능한 척
뭔가를 타이핑해 넣겠지. 누가 뭔가를 논의해오면 똑똑한 척 대답을 해.
사람들과 능숙하게 대화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익숙하게 처리하지.
타닥타닥. 한 시간, 두 시간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과 비례하여 숨이 차기
시작해. 마치 물이 차오르는 어항 같아. 그렇게 일곱시, 여덟시, 아홉시……
.
후우우우우.
요즘은 아침 일찍 책상 앞에 앉아서 동트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곤 해.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일이 없는 채로 . 어제도 별일 없었고 내일도 별일
없을 것 같고 . 아니, 별일이 있더라도 그다지 큰일은 아닐 것 같다는
믿음이 있어. 예전과 비슷한 강도의 고통이 내 삶에 찾아와도 예전보다
능숙하게 해치워버려서 그런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
매일 쌓인 아침들이 다시 일어날 힘을 줬는지 몰라. 수많은 아침이 뒤에서
쳐다보고 있어주거든. 다시 여기로 오지 말라고 . 이 정도의 바닥은 이제
아니까 내려오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 그래서 요즘은 어떠냐면 그냥 잘
자고 일어났다, 쏘쏘하다, 푹 자고 일어났다,와 같은 평이하고 그저 그런
아침들을 맞이하고 있어. 내가 이럴 수 있을 거라고 너는 알았었니? 아마
몰랐을 거야. 생각해 보니 지금의 아침은 네가 작년에 그토록 원했던
별생각 없이 눈 뜨는 아침, 바로 그거더라고 . 어제와 오늘의 나는
신생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있단다. 그게 심심하면서도
위안이 돼. 나는 이미 한 굴곡을 내려온 상태인 것 같아. 매일의 일들에
치이다 보면 정작 큰 물결이 잘 안 보이지만 이미 내려와보면 아 내가
뭔가를 지나왔구나, 하고 깨달아지는 거지. 그렇게 보면 매일마다 정점을
찍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어. 매 순간 클라이막스 속에서 살 필요는 없어.
너에게 다가가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겪지 않았으면 나도
몰랐을 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