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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랑을 지나온 사람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누군가 물어오면 할말이 없다. 오랫동안 삶의 반경에는 비장애인만 가득했고, 저 멀리 접경지대에서 이 책의 표지와 같은 불균형한 형체가 희미하게 비칠 때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하은빈의 <우는 나와 우는 우는>은 이런 시선과 정반대편에 있어온 사람의 이야기다.

    많은 대중매체에서 거동이 어려운 중증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은, 때로 현실적 제약요소에 아랑곳하지 않는 낭만적인 사랑으로 포장되거나, ‘인간 승리’라 부를만한 각오와 헌신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한 것으로 그려지고는 한다. 예컨대 이창동의 영화 ‘오아시스’에서 뇌성마비 장애인인 한공주와 그녀를 성폭행했던 한량인 홍종두의 사랑이 낭만적으로 봉합됐을 때 주변의 냉소적인 등장인물들처럼 그들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은빈은 애초 낭만적 사랑이나,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지난한 '실패’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에 세 번이나 들어간 '우는' 저자의 애인이자, 근이영양증 장애인이다. 근육이 굳어져 뒤를 돌아볼 수 없고, 전동휠체어 '동이'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다. 그런 그와 대학 장애인권 동아리에서 만나 5년간 관계를 맺어온 여정이 이 책에 담겨 있다. 형식에 있어서 30대 은빈이 우와 이별 이후 쓴 글이 메인 장에 위치해 있다면, 20대 은빈이 우와 함께하며 그때그때 작성했던 글들이 시차를 머금으며 장별로 교차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건강했던 사람을 주저앉게 만들고, 다시 누워 있게 만드는 근육병은 오로지 앞으로 전진하고, 전방위적으로 우와 은빈을 ‘세계의 가장자리’로 내모는 현실 역시 모습을 드러낸다. ‘버스를 타자’라는 장애운동의 소박한 구호가 20년째 그대로 머물러 있는 세상, 소통 불가능한 가족과 주변의 편견, 우와 비슷한 근육병을 가지고 있던 오지석, 찬이, 선배 남윤광의 죽음이 그렇다.

    한편 전반부가 주어 ‘우는’에 맞춰 일상이 서술돼 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주어는 은빈, 즉 ‘나는’으로 변하게 된다. 장애인 애인을 사랑하면서 남들이 일상에서 누리는 ‘바깥’을 욕망하면 안되는가?라는 지난한 물음과 실천은 실패를 안고, 우와의 이별로 나아간다. 그러나 저자는 그 실패에 대해서, 이 사회의 편협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기대할 법한 ‘지금까지 할 만큼 했어.’, ‘뒤늦게 정신 차렸어.’ 같은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차별과 모멸 속에서도 우와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책은 헤어진 이후 오랫동안 죄책감과 부채감 속에서 고뇌했던 30대 은빈이, 우와의 만남 속에서 그때그때 최선을 다했던 20대 은빈에게, 그리고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고 매일 가슴을 치느라 가슴팍에 푸른 멍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