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감
들키고 싶은 비밀
-
장르
에세이
-
글쓴이
피키
이 일을 꺼내놓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맨 먼저 학교가 특정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나도 이
사건의 당사자 중 한 사람으로서 속이 상했고, 동시에 해답을 찾지 못한
상황을 공유하는 게 나를 능력이 부족한 교사로 보이게 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래서 미리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 밑밥을
잔뜩 깔고 시작한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못하잖아요. 저는 그 당연한
진리를 주변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아직도 가끔 어설픈 저에게도
적용시키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단단해지려고요...
일어난 일은 그렇다. 평소처럼 수업을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가려는데 A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나를 멈춰세웠다. 허둥대는 손동작과 말이 두서없이
뒤엉켜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어진 아버지의 가정폭력, 아직 끝나지
않은 아동학대 재판.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인 어머니. 가정에서 A의 편이
되어주고 그를 보호해줄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폭력에 오래 노출되어 위험
앞에서 먼저 몸이 굳는 A. 학습된 무력감으로 짓눌린 A. 그런 A는 누군가의
부정적 언행에 곧장 얼어붙곤 했다. 싫다는 말도 찡그림도 하지 못하고,
최소한의 방어조차 없이 그대로 굳는다. 돌처럼. 아마 A와 비슷한 가정사가
있어 공통된 아픔을 겪는 B, 그리고 옆에 붙은 C... A와 같이 다니는
친구들을 모두 합치면 여섯이나 됐지만, 하나같이 약했다. 자기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면 보호해주지 않고,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식으로
모른척한다. 학교에서 당하는 괴롭힘이 부모님에게 알려지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며 움츠러든다.
그런 애들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몇몇이 그 틈을 파고든다. 얘는 내가
이렇게 해도 아무것도 못하네? 괴롭히는 이유는,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체육 시간엔 공이 세 번이나 A를
스쳤고, 던진 아이들은 실수였다며 웃었단다. 뭉퉁그린 채로 “중국인은
해파리를 먹는다더라” 같은 말들이 흐른다. 왜 그러냐고 따지면 또 “그게
왜? 너한테 한 말 아닌데.” 하겠지. 혐오를 유머로 포장한 아이들은 언제나
그렇듯 ‘오해’ 뒤에 숨었다. 요즘 시대에 ‘몰랐다’는 말은 만능 방패로
쓰인다. 불러서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물으면 (명확한 증거가 없을 경우)
아예 그런 적 없다고 발뺌하거나, 기분 나쁠 줄 몰랐다는 말을 뻔뻔스레
내놓는다. 이런 식으로 무슨 지도만 하면 상황을 왜곡하고, “왜 나만...”을
시전하면서 억울하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아이는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아이들은 자기 잘못을 직시하는 법을 모른다. 모르는 건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상당히 비겁하게 자라고 있다.
그리고 반에서 가장 당당한 여학생들. D와 F라고 하겠다. 그들은 둘밖에 안
되지만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다른 애들을 비난했다. 숨쉬듯이, 매일매일,
습관처럼. 얼마나 욕을 많이 하는지 다른 반 애들도 익히 알 정도였다.
제보를 여기저기서 참 많이 들었고, D와 F의 개인 상담 때 그러지 말 것을
회유하고, 당부하고, 경고했다. 다른 사람 욕하거나 소문 전하고 다니지
마라. 심한 장난 치지 말고, 오해를 살 만한 행동도 하지 마. 내 마음에 안
들고 이해 안 되는 친구가 있을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모든
애들이랑 잘 지내겠니? 그런데 그런 애들이 있으면 괴롭히지 말고 그냥
피해. 그냥 안 어울리면 되잖아. 싫다고 괴롭히면 안 된다.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선생님 없는 곳에서 지속적으로 험담을 일삼는 D 그리고 F. 그들을
신고하겠다고 총대를 메고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런 식으로
선을 넘을 듯 말 듯 지내온 거다.
그런데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담임인 내가 머지않아 갈 수련회 방
배정을 하는데 임의로 그 둘을 갈라놓자 내 욕을 했단다. A는 한껏
주저하고 또 두려워하면서 그들의 말을 전했다. 이녀석들, 앞에서는
예의바른 척 공손하게 웃고 수틀리면 뒤에서 그런 짓을 했다니. 뭔가 그럴
줄 알았는데 정말 그랬다는 걸 알게 되니 배신감이 들었다. 당혹스럽고
짜증도 났다. 솔직한 심정으로 내 욕 했다는 것까진 몰랐음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먹구름이 가득 꼈다. 내 기분은 누가 치료해주나.
학교 일은 대부분 교사의 속이 상하는 형태로 종결된다. 어른이니까
참아야지. 선생이니까. 애들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 가지고 언제까지
상처받을 순 없잖아... 3년간 충분히 담금질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무른 구석이 있나 보다. 악취가 나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말끔히
치우지 않아 퍼질대로 퍼진 곰팡이가 사방을 덮친 느낌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잘못도 보여 마음이 무거웠다. 잡초는 싹이 보일 때 바로
뽑았어야 했는데. 좋게 좋게 말하면 알아듣겠지 싶었고 안일하게 행동했다.
1학기 내내 “적당히 해라”라는 말로 적당히 경고하고 지나쳐왔다. 이렇게
학급 내에서 우위를 선점하고자 남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지도를 따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편견을 최대한 배제하고
긍정적인 기대를 주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라는 건 이번 사태를 통해 확실히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내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할까? 문제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접근할까?
너네 선생님 욕했다고 들었는데 진짜니? 물어보면서도 사실 답이 정해진
질문이라 생각했다. 바로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도 웃기잖아.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 자기네는 하나도 불만이 없다는 말까지 청산유수처럼 덧붙인다.
대놓고 물어봤다. 선생님이 수련회 방 배정한 거 가지고 선생님 이름 뒤에
‘년’자 붙여서 욕했다는데 진짜 아니야? 둘 중 하나가 눈치를 보더니 “저는
안 그랬어요.” 라면서 잡아뗀다. 다른 하나는 입 꼭 다물고 있고. D와 F를
더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너네 지금 선생님이 했던 말 중에서 억울한
거 있어? 있으면 지금 얘기해 봐.“ 그들은 인정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제가 이걸 했어요’라고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이
부분은 오해예요’라고 정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잘못을 시인한 것 같은
그런 상황. 그들은 그저 눈을 깔고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그날 바로
벌점을 주고 반성문을 건넸다. 맨 아래에 학부모 의견을 적는 칸이 있었다.
사실확인이 반쯤 된 상태에서 내린 나름대로 강경한 처사였다. 너희
부모님께 선생님이 직접 연락드리기 전에 스스로 무슨 잘못을 했는지
부모님께 먼저 고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리고 지금 반성문 주는 이유는
지금까지 했던 잘못들을 깔끔히 인정하고 앞으로 안 그러기 위해서 쓰는
거야. 앞으로의 행동이 중요해. 솔직히 지금 너희가 이런 모습 보여줘서
실망했는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선생님은 얼마든지 너희를 다르게
볼 거야. 반성문, 내일까지 꼭 가져오세요.
종례 시간 반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반 전체와 서먹해진
기분이었다. 아이들에게 말했다. “우리 반이 여태 조용한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나대지 마!’라고 하는 애들이 있으니 다들 눈치 보느라 가만있는
거 아니야?” 애들이 큰소리치던 몇몇을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선생님이
여러 번 좋게 좋게 얘기하고 전체적으로 카톡에서든 종례할 때든 경고를
여러 번 했는데 그런 것들이 잘 고쳐지지 않는 것 같고, 우리 반이 이런
분위기로 계속 가는 건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돌리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겪었던 것들, 봤던 것들을 써서
내고 거기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친구는 선생님이 심층 면담을 하겠다는
식으로 공표했다. 반쯤 절망적이고 분노에 찬 마음으로 설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동료 선생님들께 보여드렸다. 그런데 의외의 피드백이 있었다. 지금
우리 반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 상황인데 선생님이
강하게 나가면 반 분위기가 경직되고, 작은 일도 크게 부풀어질 염려도
있다고... 다음날 질문을 바꾸었다.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 ‘우리반
중간점검’으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면, 그때
어떤 상황이었는지?.’에서, ‘나는 학교에서 내 의견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고 느끼는지?’로. 더 좋은 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학급
구성원 모두가 함께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시험 대형으로 모두 한자리씩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설문지를 10여분 동안 쓰도록 했다. 쓸 내용이 없는 친구들은
뒷장에 선생님께 전하고 싶은 말이나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A와 그
친구들은 역시 뒷장까지 빼곡하게 써내려갔다. 예민한 레이더로 포착한
차별과 은근한 괴롭힘들을 전부. 우리반 남자 부회장은 솔직히 말해서 이런
설문을 하기 때문에 서로 너무 눈치를 보게 된다고 했고, 이런 걸 하지
말아야 된다고 했다. 녀석, 너무 솔직한 거 아니야? 그런데 또 다른 아이는
이렇게 썼다. “다른 친구들은 이런거를 왜 하냐고 할 수도 있는데, 저는
선생님이 우리 반을 위해 신경을 엄청 쓰고 계시는 것을 느낍니다. 반에서
큰 사건사고가 안 일어나는 것이 선생님이 이런 활동을 하셔서 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설문조사 결과이다. 우리반 아이들에게 공유한 내용이다.
1. 학교생활 전반 및 우리 반 분위기
-
대다수의 친구들이 학교생활에 만족하고, 우리반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 즐거우며, 매일매일이 기대된다고 응답해 주었습니다.
(평균적으로 10점 중 8점 이상)
정말 많은 아이들이 우리 반인 것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랬다. 똑똑하고 순한 아이들이 보석처럼 곳곳에 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마음이 풀어지는 아이들. 수년 간의 교사 생활 중 지금 우리
반이 가장 나았다. 그렇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A는 계속 나만 찾는다. A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 학급 규칙(안)
- 1. 청소당번 정하기 – 전원 참여
- 2. 친구 비난 금지 – 강력히 금지할 방안 필요
- 3. 욕설 사용 금지 – 스티커 붙이기
- 4. 교실 내 공놀이 금지
📝 내가 스스로 지키고 싶은 약속
- 1. 말하기·태도
-
* 어떤 친구가 없을 때 그 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선생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
* 말을 하기 전에는 항상 상대 입장을 먼저 생각한다.
-
* 나와 다른 의견도 존중하며 비난하지 않는다. (반박하고 싶은
경우에는 먼저 “좋은 의견이지만~”으로 시작하기)
-
* 친구를 꼽주거나, 비꼬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
* 갈등이 있을 때 한쪽 말만 듣고 판단하지 않는다.
-
* 내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준 친구에게는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 2. 존중과 협력
-
* 친구를 존중하고, 모르는 것은 함께 배워간다.
- * 친구가 잘했을 때는 칭찬을 많이 해준다.
[우리 반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 주어서 정말 좋은 의견들이 많이
나왔네요. 여러분이 우리 반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의 공동체를 더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어요. 선생님도
언제나 우리 반을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 가길
바랍니다.]
A는 내가 보낸 메시지들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B와 C는 하트를 눌렀다. D와
F는 우려와 달리 반성문은 정성껏 써서 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절대
없게 하겠다고 약속을 받아냈다. 필체를 보아하니 부모님들도 반성문
하단에 의견을 직접 써주셨다. 오늘날 학생 생활 지도는 학부모님들의
신뢰와 협조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반 아이들 30명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을까. 일주일 내내 이 일로 머리를 싸맸다. 아이들의 관계에
있어 담임교사가 언제나 개입할 수는 없는 법인데. 따라다니면서 감시
감독할 수도 없고. 내가 개입함으로서 일이 더욱 커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A는 어떡하나. 모두의 의견이
조금씩 다른 가운데 선생님이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데 참으로 어렵고
복잡하다. 아이들이 만든 서열과 위계질서에 담임이 어느 정도로 개입할
것인가? 오늘 아침에도 A는 선생님을 찾아와서 ‘애들이 불 켰다고 뭐라고
했어요.’ 말하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