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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동 큰집

    큰집은 중랑구 면목동 장미공원 아랫길,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집들이 모여있는 골목 안에 있다. 차 트렁크에서 엄마는 황금색 보자기로 동여맨 전·튀김이 가득 담긴 소쿠리를 꺼내들고, 동생과 내가 홍삼이나 샴푸 세트를 들고 간다. 시간이 얼마가 흐르든 늘 이 모습일 것처럼 단단한 돌계단을 반 층 오르면, 올 때마다 허리가 조금씩 더 굽어있는 첫째 큰엄마가 종종걸음으로 나와 ‘어서 오니라’ 하며 손에 들린 짐을 얼른 뺏어 한 켠에 놓는다.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동생과 나는 뻘쭘해지고, 엄마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엄마가 상을 차리고, 제기를 놓고, 사과 윗둥을 예쁘게 깎고, 준비한 전들을 원뿔 모양으로 쌓는 동안 동생과 나는 20살 차이 나는 사촌 언니의 오래된 방에서 피크민을 하며 시시덕거린다.

     사촌 언니의 방은 정말 신기하다. 창 밖으론 맞은편 집의 빨간 벽돌이 보이고, 창문 틀은 샷시도 없이 바람 불면 덜컹덜컹 소리를 내도록 나무로 짠 프레임이다. 마찬가지로 열 때마다 끼익 비명 소리를 내는 나무문에는 2002년 월드컵 주역의 스포츠 기사를 오린 신문 스크랩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다행히 올해는 사촌 언니가 집에 없다. 아빠가 스무살 때, 사촌 언니가 살던 이 집에 얹혀 살면서 재수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언니는 중얼중얼거리는 목소리로 항상 동생과 나에게 우리 아빠 욕을 했기 때문에, 주인 없는 방에 들어와있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다.

     때가 되면 엄마가 문을 열고 평소에 하지 않는 사근사근한 말투로 나와서 절을 하라고 한다. 원래 우리집 제사는 1년에 7번이었고 명절 제사는 작은집과 오촌 아재집까지 세 번씩 지냈는데, 코로나 이후로 큰집만 모이는 걸로 줄더니 제사도 할아버지·할머니 합동으로 한 번만 치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몇 년 전 결혼한 셋째 큰엄마네 사촌 오빠가 명절에 일을 해서 큰집에 오지 않은 덕에, 올해 처음으로 여자인 동생과 내가 안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절에는 항상 규칙이 있었다. 두번 빠르게 절을 한 이후에는, 엎드린 자세로 기침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길게 절을 하는 시간이 있다. 이전까지 부엌에서 절을 할 때는 몰랐는데, 우리 아빠가 그간 기침 소리를 낸 사람이고 그렇게 신호를 주는 것이 제사에서 ‘좌집사’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창 조용한 시간이 지나가면 차례상을 치우고 밥상을 내는 순서가 찾아온다. 마흔이 가까워오는 사촌 오빠들은 무거운 상을 옮기고는 미련 없이 방으로 들어가고, 동생과 나는 가만 있기 뭐해 과일을 깎기 시작한다. 엄마가 했으면 단박에 끝냈을 과일 깎기를 동생과 나는 사과가 손의 온기로 갈변 될 때까지 붙잡고 한다. 엉성하게 생율을 반 갈라놓고, 사과대추까지 잘라 놓으려던 것을 셋째 큰엄마가 발견하고 대추는 안 잘라도 되는 것이라 말해준다. 첫째 큰엄마가 쟁반에 올려주는 탕국을 받아 하나둘 식탁에 놓으면 엄마와 큰엄마들보다 먼저 숟가락 들 기회가 주어진다. 나는 엄마가 자리 앉는 것을 확인하곤 밥을 먹기 시작한다.

     아빠는 4남 1녀 중에 막내인데, 형제끼리 나이차도 많이 나는데다가 우리 엄마는 아빠보다 6살이나 어리다. 부엌일을 마치고 큰엄마들 사이에 앉아 헛제삿밥을 먹는 엄마를 보는데 말도 안되게 애기 같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 빠글머리에 동글동글 얼굴, 큰 눈을 도록 도록 굴리며 큰엄마들 대화를 듣는 엄마는 30년 동안이나 새댁이라 불린다.

     원래 오후 늦게나 오셔서 몇년 간 얼굴 보기 어려웠던 고모가 큰집에 왔다. 고모는 아빠만 보면 충해가 돈복이 있고 좀 쓰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몇 년 전 밤낮없이 1년간 당구장을 운영하며 얼마의 돈을 쥐었던 것은 매 명절마다 계속되는 레퍼토리다. 둘째 큰엄마가 돈복도 있지만 애기 엄마가 서포트를 잘했기 때문 아니냐며 말을 보탰다. 실제로 가게에서 닭볶음탕을 한솥 끓여 손님들에게 소주 안주로 팔아 단골을 만들었던 건 엄마였다. 엄마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둘째 큰아빠는 충해가 잘되는 것은 제사를 잘 드리기 때문이라고, 얼마나 좌집사 역할을 열심히 하는데, 하고 말했다. 와하하, 한 번 웃고 어른들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교 신자인 첫째 큰엄마는 발우공양 하듯이 대접에 물을 부어 남김없이 마신다. 그쯤 되면 엄마는 이미 그릇을 걷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엄마를 따라가 설거지를 돕는다. 엄마, 아까 큰엄마들 사이에서 엄마 밥 먹는 거 보는데 엄마 완전 애기 같앴다? 짱웃겼어. 여기서는 애기지. 너네는 그렇게 얘기하는데 밖에선 안 그래.

     동생과 나는 대화판이 시작되기 전에 큰집을 떠난다. 엄마는 사과를 집어 먹으며 어른들의 대화를 듣다가 대여섯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올해도 한 차례 추석이 지나갔다. 올해는 특히 연휴가 길어 외가에 갈줄 알았는데, 다음달 외할머니 첫 기일에 갈 예정이니 이번엔 굳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외가에 갔으면 좋겠다. 거기서 엄마는 평소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 눈을 크게 뜨고 애기같이 팽팽한 얼굴보다, 축 풀어져서 구겨지게 웃는 모습이다.

     엄마가 언제쯤 육전 부치는 일을 그만하게 될까 생각하면 첫째 큰엄마가 떠오른다. 엄밀히 말하면 큰엄마의 면목동 집은 더이상 큰집도 아니고, 큰엄마도 큰엄마가 아니다.

     살아계셨다면 일흔이 넘었을 첫째 큰아빠는 20년 전 돌아가셨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두 분은 별거 중이셨다. 아무도 큰아빠를 찾지 않아 큰아빠 가게에 방치되고 있던 시신을 우리 아버지가 수습했고, 8살이었던 나에게 아빠는 시신에 구더기가 얼마나 많았는지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첫째 큰엄마는 그 이후 20년 간 똑같이 무 나물을 무치고 도토리묵을 쑤어서 봉지에 나눠 죽은 남편이 남긴 올케와 시조카에게 쥐어주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하고 또 이상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엄마와 아빠는 1년에 세 번씩 꼬박꼬박 면목동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