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우울할 때 보통 어떤 행동을 하나요?
(영어로)
- 글쎄요... 저는 우울한 적이
별로 없어요. (마찬가지로 영어다)
스물 두살 교양필수로 들은 영어수업에서는 옆에 앉은 친구와 대화하는
시간을 10분 정도 가진다. 그날 수업의 주제는 건강과 셀프케어 어쩌고
그런 것이었고, 3년째 우울증이 안 나아서 도대체 셀프케어가 뭐냐 세상에
욕이라도 하고 싶은 유정이는 충격을 받았다. 우울한 적이 없다고? 유정이
근처에는 우울한 애들 투성이었다. 미대여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밝게
말하는 그 여자애는 경영학과라고 소개했었다. 경영... 그래 문과놈들은
예술하는 놈들 대가리 따위랑은 차원이 다르게 건강할 것이 분명하다.
건강하지 않았으면 예술했을 테니깐.
수업 이후 학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데워먹을 때도 유정이는 정신이
얼얼했다. 우울증까지는 아니어도, 우울한 적이 별로 없는 사람도 있어?
갑자기 정신이 말 그대로 발끝까지 외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정신은
발이 없는 놈이라 도망도 못 가지만, 말 그대로. 그래서 결론이 바로
결정이 난다. 오늘 죽어야겠다. 평소보다 삼각김밥 김이 질긴 것도
한몫했다.
예술하는 애들이
활동하는 곳에서 죽었다가는 다른 애들도 죽고싶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술학관 패쓰. 수업만 하는 문과대도 패쓰. 죽을만한 도구가 없다.
공대건물은 어떨까 생각했는데 전기회로같은걸로 어떻게 몸을 연결해서
죽을지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공학관도 패쓰. 건축하는 친구들은
훨씬 날카로운 30도짜리 칼을 쓴다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건축학관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막상 도착한
건축학관에서는 눈알이 텅 빈 학우들이 컴퓨터를 딸깍이고 있었다. 몇 명이
모형을 제작하고 있다. 하필 실기실이 다 열린 곳이라 자신 있게
들어가기가 조금 뻘쭘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죽을 거라 상관없겠다는
결론이 났다.
콰자작.
누군가 실수로 도색을 하고 말려놓은 모형을 발로 밟은 모양이다. 탄식이
들렸다. 유정이 밟은 건 아니지만 꽤나 놀라 복도에 몸을 숨겨 가만히
서있었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모형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가만히 있다가
노트북의 뚜껑을 닫더니 일어선다. 그리고 무용수마냥 부드럽게 걸어서
창가로 간 뒤 부드럽게 창문을 밀고 밖으로 떨어졌다. 밖은 4층 데크가
있다.
콰자작.
모형 주인이 자살했다.
유정이는
순식간에 순서를 빼앗겨버렸다. 참으로 거짓말 같네. 남이 죽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기가 죽으려 했다는 것조차 까먹어버렸다. 유정이는
시끄럽게 발작을 시작했다. 숨이 안 쉬어진다. 우울증에 덤으로 있는
공황발작도 유정이가 가진 것 중 하나다. 그치만 역시 아무도 유정이를
도와주지는 않는다. 원래 사람들은 남이 소음을 내도 그닥 신경쓰지
않는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유정이는 비척비척 일어나서 집에 갔다.
그리고 따뜻한 국물의 라면을 먹고 따뜻하게 이불 덮고 잠에 들었다.
그 후로 일주일 이후 학교 게시판에
자살 현장을 목도한 학우들의 상담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공지사항을
확인했다. 유정이는 상담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날도 역시 우울했기
때문이다.
길을 몇 번 헤맬
뻔했으나 학생상담 지원센터에 도착해서 선생님께 상담을 받고싶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대기가 32번이었다. 현장에는 10명 남짓이었던 것
같은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서 온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유정이가
받은 상담 날짜는 일주일 이후였다. 그 안에 내가 죽으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늦게 상담을 해주는 거야? 유정이는 화가 났다. 그러나 별수
없었다. 오늘은 별로 사람들 앞에서 쇼를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쇼해도 아무도 안 알아주기도 하고, 대부분 사람들의 시간만 빼앗기
때문이다. 유정이는 우울증 환자가 주변에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종종 멀쩡할 때만.
유정이는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실기실에 도착했다. 친구들이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누구는 소주병 라벨을 떼고 계속 술을 마시면서
작업을 한다. 친구가 왔냐고 얼굴을 돌려 인사를 한다. 친구는 손에 붓을
들고 있었고, 진도는 유정이보다 일주일 치 빨랐다. 그게 참 부러웠다. 다
같이 정신병이 있는데 왜 쟤는 이렇게 빠른 걸까. 이런 감정을 가질 수록
본인 손해라는 것을 유정이는 알고 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다.
친구와 어쩌다 물감통을 같이
씻으러 나가게 되었다. 개수대에서 손을 걷어 물을 잔뜩 받아낸다. 색이
섞일수록 구린 색이 나온다. 구정물 색.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색을 너무
많이 덮으면 쓰레기 같은 색이 나온다고 입시할 적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낸들 내 생각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이제 따질 선생님도 없다. 교수님한테 따져봤자 장학금을 놓칠 뿐이다.
유정이의 손목은 일자로 그어진
흉터투성이다. 그래서 개수대에 친구들과 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괜히 들키는 게 싫다. 동시에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게
싫다. 끝내 발견해 내지 못하는 친구들이 싫다. 그런데 웬걸? 진도 빠른
유정이 친구의 손목은 아주 깨끗하다. 심지어 솜털 하나 없이 맨들맨들
부드러워 보이는 팔이다. 피부가 너무 깨끗하다. 깨끗한 피부. 깨끗한
도화지마냥. 이제는 읽는 사람이 누구나 알다시피 유정이는 또 죽고
싶어진다. 졌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패배자로 나머지 인생을 도무지 견뎌낼
수 없다.
컥.
실기실 안에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친구와 유정이는 눈이 마주쳐 얼빠져있다가 둘 다 물감통을 놓고
재빨리 들어간다. 소주 몰래 마시던 그 친구다. 두 눈이 발발거리며
빨갛다. 얘 약 같은 거 없나? 야 얘 술 취해서 약도 못 먹여. 119 좀
불러봐!
컥.
그게 술 취한 그 친구의 마지막 숨이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는 그
친구는 눈을 감지도 않는다. 손에는 물감투성이다. 실기실이 조용해졌다.
실기실에 있는 모두가 그 친구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유정이 옆에 서 있던 친구가 술에
쩔은 시체에 다가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친구들도 하나둘 그 옆에 모여
쓰러진 시체의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누구는 다시 119를 부른다.
깨끗한 팔로 야무지게 두 팔을 걷어 심장을 압박하는 그 친구는 숨이 차자
목폴라를 벗었다. 머리를 풀어 헤쳐 아무도 못 봤을지 모르지만 유정이는
봤다. 심폐소생술을 하느라 머리카락으로 다 가려진 그 애의 목덜미는 빨간
줄로 얼룩덜룩했다.
과음으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그 후로 과제전을
하는 날이 다가왔다. 한 명은 공석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학교의 행정을
멈출 수는 없다. 그게 비단 자살이어도. 그 애 덕분에 실기실 내 음주
금지팻말이 이곳저곳 달렸다. 원래도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유정이는
학교에 잘 갔다. 유정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이상하게 남들이
선수 치는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났지만 유정이는 우울증에 절여져 생각이
짧아졌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고민되지 않았다. 유정이는 지금 죽음이
두렵지 않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상태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과제전의 피드백은 그럭저럭했다.
입시 때부터 들었던 말이다. 칙칙하다. 어둠이 너무 많다. 진부하다.
너같이 자기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애들의 작업 형태는 요즘 너무
흔해빠졌다. 진도가 빠른 옆 친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요함이 없다. 선
터치에 간절함이 없는 것 같다. 마감이 대충대충이다. 그 애는 오늘도
목폴라를 입었다.
유정이는
피드백이 끝난 후 쉬는 시간에 옆 친구에게 연고를 건네줬다. 원래는
발라주고 싶었지만, 옷에 가려져있으니 실례라 생각했다. 친구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비밀로 해달라는 말과 함께.
다음 날 까마득한 새벽 밤, 목폴라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잔뜩 취해있었다. 어떤 남자가 자꾸 자기를
사랑한다고 한다는데 자기는 아니라며, 횡설수설했다. 유정이는 자신 집
주소를 보내주었고, 목폴라 친구는 곧 도착했다. 담배 냄새랑 향수 냄새랑
이상한 토 냄새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이 친구를 옷입힌 채로 샤워기
아래로 던지고 싶었다. 보아하니 클럽을 전전하다 전화를 건 것 같았다.
목폴라 친구는 보고 싶었다며 껴안았다. 그리곤 배고프다고 털썩
주저앉아버린다. 유정이는 마침 엄마가 냉장고에 넣어준 가지무침이
있었다. 친구에게 가지무침과 참치캔을 따주었다. 친구는 원래 가지를 안
먹는다고 젓가락질을 주춤거리다가 한입 먹더니 너무 맛있다며 반찬통을 다
비웠다. 그제야 그 애 팔이 깨끗하기 이전에 깡말라 부러질 것 같다는 걸
깨달았다.
- 너 밥 안 먹냐?
- 밥 안 먹고 싶어.
- 지금도?
- 지금은 먹고 싶어. 다 먹고 싶어 지금은.
유정이는 선물로 받은 양주를 까서
같이 참치를 주워먹다가, 같이 편의점에 가자고 신발을 신겼다. 빌어먹을
워커는 왜 또 멋 내려고 신어 가지고, 친구는 신발을 신다가 꼬꾸라졌다.
넘어진다며 유정이는 자신의 운동화를 신기려 했지만 친구는 슬리퍼를
신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 나
나가서 편의점까지 막 뛰어갈 건데?
- 나
이거 신고도 뛸 수 있어.
친구랑
손을 잡고 5분 거리의 편의점으로 막 달리고 나니 웃겼다. 하루살이가
가로등 아래에서 내일 죽을지도 모르고 춤을 재밌게도 췄다. 유정이는 그게
꼭 우리 같다고 생각했다. 재밌지 않으냐 했더니 친구는 재밌는 거보다 좀
힘들다고 얘기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래도 웃고는 있었다. 그래서
유정이는 안심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와르르 쏟아냈다. 소주병이 쏟아지고, 편의점 족발이랑
맛살이랑 타대학 크림빵 같은 걸 사는데 이만 얼마를 썼다.
친구랑 잔뜩 먹고 잔뜩 울고 껴안고
매트리스에서 잠을 잤다. 자기 전에 목에 연고를 발라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는 잔뜩 취해서 비록 유정이 상처에는 연고를 발라주지
못했지만, 유정이는 이 정도로 괜찮은 것 같았다. 자기가 받고 싶었던 걸
남한테 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냥 괜찮은 것 같았다. 친구는 자는 내내
유정이가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꼭 안고 잠을 잤다. 연고 냄새랑 피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그날은 별로 안 죽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유정이의 상담 날 당일이
다가왔다. 막상 다가오니 우울증이 좀 괜찮은 시기가 와버린 탓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유정이는 말을 골라야했다. 상담사분은 피곤해 보였다.
다만 사람 좋은 표정으로 공감하는 얼굴을 잘도 지었다. 상담사분은 한참
타자를 치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아니 그게 잠시가 아니라 몇 분이
되었다.
- 유정 학생이 죽고 싶다고
결심할 때마다,
- 네.
- 누군가가 죽는 이상한 일이 두 번이나 벌어졌군요.
- 네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되게 살인 용의자같이 들리는 것
같아요.
상담 선생님은 이전에
자살한 학생들과 말을 한 적이 있었는지, 무슨 얘기를 하던 사이였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꽤나 불쾌했다. 의심받는 것 같아. 의심받는 중인 것
같아. 나 의심받는 것 같아 지금.
-
그런데 선생님, 저는 상담을 받고 싶어서 왔어요.
- 유정 학생은 그 학생들이 죽어서 힘든 게 아닌 것 같아요.
맞다. 유정이는 그냥 무료로 상담이 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건 정말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의심을 받는 중인걸까? 유정이는 생각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가 눈을 한 쪽씩 깜빡인다. 공황 전조 증상이다.
- 선생님, 저 숨이 또 잘 안
쉬어지는 것 같아요.
유정이는
밖으로 이동되었다. 매트가 깔린 방에서 쓰러졌고, 상담사 선생님은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 이럴 때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상담사 선생님이
원래 도와줘야 했던 게 아닌가? 숨을 어떻게 다시 쉬는지, 어떻게 하면
눈을 병신같이 뜨지 않을 수 있는지 같은 거를. 어떻게 하면 죽고 싶지
않은지.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잘 살고 싶은 그런 희망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건강이란 무엇인지.
내가 남들보다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뭐가 그렇게 부족했는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 유정 학생,
경찰서에 같이 가줘야 할 것 같아요.
좀 진정된 유정이에게 들린 말은 그런 것이었다. 가기로 했다. 찔리는 거
없다, 우울증 환자라는 거 빼고는. 다만 두려운 것은 경찰서에 가면 이후
과제전에 내야 하는 작업에 쓸 시간이 너무 부족해진다는 것이었다. 아
그리고, 그리고, 곧 있으면 영어 교양수업인데, 그 친구한테 뭘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안 우울하고 행복한지 물어보지도 못했고, 나는 아무한테도
연고가 발라진 적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생각을 하니, 유정이는
도망가기로 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입시를 같이 보내던
친구가 해준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망치지 않아도 낙원의 낙자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괴로움뿐이다.
유정이는 얼기설기 연결된 학교
건물들의 복도를 마구 달렸다.
어디서 사이렌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거짓말 같다. 그냥 상담이 좀 받고
싶었을 뿐인데 나한테 이럴 것까지는 없잖아. 유정이는 빈 강의실에
숨었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얼마 전 친구와 같이 밤거리를 달릴 때는
분명 재밌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재미없다. 고통스럽다. 땀이 떨어지고
심장이 튀어나와서 발딱거릴 것 같다.
너무너무 죽고 싶어서 괴로웠다.
등부터 신경 줄기 하나하나까지 타는 것처럼 괴로웠다. 몸이 막 저리고
내장이 저려오는데 아무것도 못 하겠다. 또 숨이 안 쉬어진다. 또
발발거린다. 바보같애. 나는 너무 바보같애. 숨도 못 쉬잖아, 남들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를. 제발 죽여줘 제발 제발 나를 좀 죽여줘.
유정이는 남들한테 피해줄까봐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여자애다.
흐어억.
그 순간 인문관 화장실에서
세명이 집단자살을 시도했다.
흐어억.
화장실에서 자살을
준비하던 세 명은 같은 과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해 피해사실을 공유하다
남자친구에게 밝혀지고 가족들에게 무시당하고 경찰들에게 외면당해 죽음을
결심했다. 경찰은 화장실 옆 강의실에 쓰러져있는 유정이를 발견하고
상담사의 소견에 따라 며칠 이후 몇 가지를 물었지만 별다른 것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유정이는 이제
확신하게 되었다. 자신이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자꾸 누군가가
자살한다. 심지어 집단자살을 한 학생 중 한 명은 우울한 적이 없다고 했던
바로 그 영어교양의 학생이었다. 몇 주 만에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우울해질 수 있구나하고 유정이는 생각했다. 건강도 별거 없네. 건강도
별거 없어.
유정이는 자신의 우울이
자꾸 주변을 좀먹는다는 걸 완벽하게 깨달았다. 얘기를 하고 티 내지
않아도 물먹은 솜마냥 주변 옷가지도 적시는 게 우울감인데, 공기 중으로도
전파되는 건 처음 알았네. 유정이는 이제 생각까지 통제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완전 웃긴다고 생각했다. 경찰조사를 받고 집에 들어온 날
방바닥에서 옷도 못 벗고 웃으면서 울었다. 괴롭다는 감정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이 안 죽을 테니까.
유정이는 그날 처방받은 일주일 치
약을 다 때려 넣고 술 한 병을 그대로 목구멍에 들이밀어 넣고는 옷을 다
벗고 에어컨을 18도로 틀었다. 그리고 에어컨 리모컨을 변기에 빠뜨렸다.
그리고 새벽 한밤중에, 유정이는
- 아 추워... 살려주세요...
다 까진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다.
그 때
목에 선 긋고 있던 목폴라 친구는 갑자기 이짓거리를 그만하고 싶어졌다.
살고 싶은 마음이 막 샘솟았다. 안 그래도 오늘 유정이한테 또 속내를
털어놓고 싶어 집 근처 골목까지 왔다가 전화를 받지 않아 집 앞 골목에서
자해 중이었는데, 문득 그런 기분이 든 것이다.
간절하게 살고 싶어졌다. 몸이
옹송그려질 정도로 외로워서, 죽고 싶은게 아니라 주변에 누구라도 좋으니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목폴라 친구는 유정이에게 지금 달려가서 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계단을 마구 올랐다. 문을 마구 두들겼지만, 실외기
소리만 시끄럽고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유정아! 김유정!
- ...
- 나 이유정인데! 문 좀 열어봐!
유정이는 결국 외웠던 번호로 현관문을 열었다. 몇 번을 틀렸지만 이내
문이 열린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공기가 밖으로 마구 쏟아졌다. 안에
있던 유정이는 잘못 태어난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유정이는 유정이를
마구 때렸다. 유정이가 눈을 뜬다. 유정이가 유정이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
- 유정아, 너 미쳤어?
- 나 추워, 추워 여기, 으, 추워.
유정이는 에어컨 전선을 뽑아서 냉기를 멈춰냈다. 유정이가 살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유정이가 유정이의 에어컨을 꺼서 유정이를 살렸다. 이상한
일이다. 살고싶은 마음도 전염이 되나봐.
사실 너무 살고 싶었어요.
눈을 뜬 유정이는 생각했다.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기에는 너무나도
진부하지만 그런 소리나 들었지만 사실 남들이 알아줬으면 생각했지만 결국
이번에는 성공했지만 다음에는 안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오랫동안.
잘하고 싶었어요. 그냥 잘하고
싶었고, 잘 살고 싶었습니다.
유정이들은 서로에게 엉겨서 오랫동안 울었다. 현관문이 열려있던 탓에
옆집 사람이 문을 열고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도 못했다.
잠시 얼려있던 유정이는 몸이 따뜻해지자 콧물도 흘렸다. 얼굴이 체액
범벅이었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미끄러웠다. 그러나 기억하는가? 우리
태어날 때 모두 끈적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오물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태어나는
것에 대해 숭고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유정이는 그 사람들에게
감사했다. 태어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온몸이 시큰거리고, 심장이
뛰면서, 폐가 처음 기능하는 것처럼 따갑고, 온몸의 신경이 생경하지만
익숙했다.
유정이는 그날
갓난쟁이마냥 크게 울었고, 크게 헐떡였으며, 크게 토했다.
어렴풋하게 창 밖에서 해가 뜨면서
하늘색은 텁텁하게 밝아지고있었다. 유정이는 또 오게 될 밤에게 작별했다.
또 봅시다. 그리고 밝아지는 허공에게는 오랜만이라며. 그리고 또 사실
너무 싫었으며 사실은 보고싶었다고.
허기를 느끼게 되었다. 배 속을
채울 때가 된 것 같아.
-
그 이후로 유정이 옆에서 감정이 전염되는 기현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의 우울 전염과, 한 번의 욕구 전염을 끝으로 다섯 명이 죽고
두 명이 살았다. 유정이는 약을 꼬박꼬박 잘 먹었으며, 학교도 빼먹지 않고
다니고 있다. 우울할 것 같을 때 릴스를 보고 기도를 한 탓에 꽤나 신실한
중독자가 되기도 했다. 크게 변한 것 없다. 다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본인을 위한 선물 같은 것이었다. 맛살이나
참치캔으로 만족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초밥 먹으려면 살아야지, 다음
주에도 초밥을 먹을 수 있는걸.
다만 이제,
- 김유정, 오늘도 초밥
먹어?
- 이상해, 너 초밥 먹을 때마다
우리도 맨날 초밥이 먹고 싶음.
- 그니까,
나 이상하게 일주일에 한 번씩 김유정 따라 초밥 먹는 듯.
유정이 옆에서는 같이 릴스 보고싶어 하고 같이 따라 기도하고 초밥 먹는
친구들만 생겼다. 유정이는 친구들을 위해, 다음 주는 초밥 말고 다른 걸
먹고 싶어 해 볼지 고민하게 되었다. 초밥은 채소가 없어서 건강하지
않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