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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살라(masala)

    인도의 공기는 이미 한 번 삶은 양파 냄새처럼 눅진했다. 이른 오후, 시장의 한가운데서 나는 향신료 포대들 사이에 서 있었다. 커민, 터메릭, 가람 맛살라. 손끝에 닿는 순간마다 매운 냄새가 손바닥에 들러붙었다. 사람들은 그걸 ‘풍미’라 불렀지만, 내겐 그저 냄새였다. 도망치고 싶은 냄새, 그러나 결코 벗겨지지 않는 냄새.

     집 근처의 노점에서 맛살라 차를 시켰다. 뜨거운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계피와 카다멈이 코끝을 스쳤다. 혀에 닿는 순간, 모든 감각이 일시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곧, 그 맛은 사라진다. 입안에 남은 건 아무 향도 없는 텁텁한 물기뿐. 나는 문득 깨달았다. 적절한 소스란 결국 ‘없음’의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소금과 설탕, 사랑과 욕망, 혹은 누군가의 몸을 끝없이 부어 넣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나는 그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래서 늘 더 넣었다. 매운 것을, 단 것을, 자극적인 것을. 그러다 결국, 내 안의 혀가 타버렸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게 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엄마는 각성했다. 평생 공짜로 하던 청소를 이제 돈 받고 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부’라는 직함에 사표를 내고, 청소부로 취직했다. 취직한 엄마는 갑자기 최신 기능이 탑재된 사람처럼 변했다. 촌스러운 핫핑크 모닝을 칠백만 원에 사더니,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를 택도 떼지 않고 옷장에 전시했다.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단백질 쉐이크를 마셨다. 그리고 한정판 운동화를 모았다. 주말이면 핫핑크 모닝에 자전거를 매달고는 어디든 떠났다. 삼만 원짜리 원터치 텐트를 치고 노숙에 가까운 캠핑을 하며 빅뱅 노래를 들었다. “태양 목소리, 진짜 좋지 않아?” 엄마는 빅뱅의 <LOSER> 어느 구절을 반복해서 흥얼거리며 웃음과 고개 끄덕임을 반복했다. 그렇게 엄마는 갱신되었고, 아빠는 구버전으로 남았다.

     평생을 가정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돈을 직접 벌게 되자, 아빠의 세상이 아니, 아빠의 속이 뒤집히는 게 느껴졌다. 아빠는 업데이트가 지원되지 않는 오래된 가전제품같이 말을 걸면 삐걱거렸고, 새 상황이 들어오면 멈췄다. 엄마가 아저씨들과 어울리는 것 같다며, 엄마는 어디 갔냐며 말끝마다 분노가 튀었다. 아빠는 내게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통화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욕설이 섞인 숨소리, 세상을 원망하는 낮은 중얼거림. 나는 그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건 통화가 아니라, 내가 그의 쓰레기통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는 걸. 전화를 끊고 나면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아빠의 목소리가 귀에 남았고, 나는 그 목소리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결심했다. 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으로 가겠다고. 아빠는 카카오톡을 잘 못 썼고, 그건 내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희미한 구멍이었다.

     그 무렵 엄마는 아빠의 언어를 버리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여자 없이 밥솥 뚜껑도 못 여는 남자랑 못 살겠다”라고 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묵은 금속 냄새가 났다. 엄마는 아빠에게는 등을 보였고, 내게는 웃음 대신 스무 해 넘게 서랍 속에 넣어둔 돌 반지를 팔아 만든 돈을 손에 쥐여주었다. “그게 네 팔자면 여기서도 죽을 거고, 안 죽을 팔자면 어디서든 살아. 말릴 맘 없어.” 엄마는 몰랐을 거다. 그 여정의 목적이 단지 세상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빠로부터의 도피, 그런 아빠 곁에 남아 있던 엄마로부터의 도피, 아무렇지 않게 그 옆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우리 가족 전체로부터의 도피였다는 걸.

     학교 게시판에 붙은 한 장의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해외 봉사 모집 포스터였다. 비행기표만 있으면 1년간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지원서를 냈다. 면접은 없었고, 두세 번의 짧은 교육이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인도로 갔다.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나를 ‘short-term missionary’라 불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틀 뒤쯤 알게 되었다. 단기선교사. 나는 힌두교도가 80%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그들의 신을 부정하는 메시지를 전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무교였고, 신앙은 나와 먼 세계의 언어였다.

     내가 아는 교회는 늘 잘못을 빌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교회는 달랐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이미 대신 지고 죽었으니, 우리는 죄가 없다는 것, 그들은 잘못을 빌지 않았다. ‘그럼 예수가 내 모든 죄의 값을 선불로 결제했다는 건데, 막살아도 되는 거 아닌가?’ 그들은 일반 교회를 ‘세상 교회’라 불렀다. 내 휴대폰에 있던 노래들은 ‘세상 노래’, 한국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세상 친구’. 나는 예쁜 옷을 삼단 이민 가방에 가득 채워 수하물 추가 요금까지 내서 가져갔지만, 그곳에서는 교회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만 입을 수 있었다. 매일 거리로 나가, 선교를 명목으로 A-Teens의 〈Upside Down〉에 맞춰 춤을 췄다. 새벽 다섯 시에는 일어나 4층에 달하는 교회를 닦고, 밥을 하고, 목사의 아이를 돌봤다. 나만 빼고 모든 친구 부모님이 이 교회에 다녔고, 그 부모님도 교회를 통해 만나 결혼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들에게 이곳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가듯, 인생에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다음엔 교회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게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치 내 혀끝의 미각이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이곳에선 술과 담배는커녕, 먹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지정된 식사 시간에는 감자와 토마토, 렌틸콩, 그리고 맛살라가 제공 되었고, 부탄가스와 버너, 오래된 냄비를 쓸 수있었다. 목사는 ‘봉사활동을 올 때, 호텔을 생각했냐’며 ‘스스로 컨트롤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내가 가져간 달러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거두었다. 와이파이는 잠겨 있었고, 유심칩은 없었다. 그리고 엄마가 국제택배로 보내 준 라면과 냉동식품은 목사 부부의 냉장고로 들어갔다. 매번 ‘너를 위해서’라는 말과 함께였지만, 내겐 그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인 먹거리일 뿐이었다.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로 밥을 먹지 말고 방에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 허기가 속을 긁었다. 가방에서 비스킷 하나를 꺼냈다. 봉지를 여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친구가 날 보며 속삭였다. “하나님은 모든 걸 보고 계셔.” 그 말에 입안의 부스러기가 돌덩이로 변했다. 목을 타고 내려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찬물처럼 얼굴을 쳤다. 2층 난간 아래엔 내 키 정도 되는 담이 있었다. 나는 창틀을 꽉 잡고 몸을 내밀었다. 발끝이 공중을 더듬었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 발가락에 온 힘을 줬다. 담 아래 1층 바닥이 가까웠다. 나는 숨을 몰아쉬고, 뛰어내렸다. 무릎이 저릿했지만, 안도감이 밀려왔다. 유심이 없는 휴대폰을 쥐고, 맥도날드 앞에 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돈이 없었으니까. 대신 문 앞 계단에 쪼그려 앉아 와이파이를 잡았다. 곧이어 문구가 화면에 떴다.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멀리 도망치고 싶었던 사람이, 지금은 유일하게 닿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아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단어들이 흐트러진 채 입 밖으로 쏟아졌다. 목이 잠기고, 손에 쥔 휴대폰이 땀으로 미끄러졌다. 나는 여행사의 이름을 말했다. 내가 왔던 경로를 되짚듯, 천천히, 그러나 다급하게. 가능한 가장 빠른 날짜로 표를 바꿔 달라고. 아빠의 대답이 들릴 듯 말 듯 흔들렸다. 그리고 화면이 멈췄다. 신호가 끊긴 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이, 울다 지쳐 잿빛으로 번져 있었다. 이토록 절실하게 아빠를 불렀던 적이 있었던가. 그 절실함이 가장 큰 패배처럼 느껴졌다. 그때,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해요?” 나는 말했다. “한국에 가고 싶어요. 그런데 인터넷도 안 되고, 돈도 없어요” 그는 지갑을 꺼냈다. “이 정도면 될까요?” 그때, 오토바이가 내 앞에 멈춰 섰다. 현지인 선교사였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나를 보자마자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마치 도망친 물건을 다시 회수하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순간, 다른 손목이 반대편으로 끌려갔다. 지갑을 열고 있던 남자였다. 놀란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너, 얘 알아?” 공기가 순간 멎었다. 선교사는 잠시의 침묵 끝에, 뜻밖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 나랑 같이 사는 애야” 그 말은 너무 완벽한 오해였다. 짧고 단호했으며, 부정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칼처럼 공기를 가르자, 남자는 천천히 내 손을 놓았다. 그의 눈에 떠다니던 연민이 순식간에 의심으로 식어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지갑에서 종이쪽 하나를 뜯어냈다. 책의 모퉁이 같았다. 볼펜으로 번호를 쓰더니, 내 손에 꼭 쥐여줬다.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손바닥에서 그 종이가 미끄러져 나갔다. 나는 뒤돌아보지도 못했다. 모든 것이 너무 빨랐고, 그 종이 한 장에 담긴 현실로 돌아갈 기회도 함께 사라졌다.

     목사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입이 벌어졌다. 목에 핏줄이 서는 게 보였다. 멀리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고함을 지르는 사람처럼, 나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현지 교인 친구가 몰래 핫스팟을 켜줬다. 메시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아빠였다. [아빠가 여행사를 통해 표를 바꿨거든? 근데 항공사에 확인하니까 비행기표는 바뀌지 않았대] 나는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손끝이 떨렸다. 그 여행사도 교회가 운영하는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이, 내 세계의 모든 문이 잠겨버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목사에게 말했다. “아빠가 많이 불안해하세요. 직접 통화 한 번만 해주시면 좋겠어요.” 내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공포와 분노가 엉겨 붙은 소리였다. 며칠 뒤, 아빠와 목사가 통화를 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공기의 밀도는 달라졌다.

     그로부터 2주 뒤, 나는 공항 앞에 내려졌고, 손에는 사모사가 들려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목사가 내게 건넨 것이었다. 기름이 배어 손바닥을 따라 미끄러지는 종이봉투를 붙잡은 채,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사모사를 한입 베어 물었다. 사모사는 늘 담장 너머 시장에서 풍겨오던 냄새로만 알던 음식이었다. 손에 쥐고 있으니 매운 맛살라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매운맛이 속을 덥히지 못했다. 오히려 더 허하게 만들었다. 한입, 또 한입. 씹을수록 입안에 남는 건 향신료가 아니라, 망가진 믿음의 잔향이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서 나를 맞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내 옆에는 한 번도 입지 못한 옷들이 가득 들어 있는 삼단 이민 가방만 놓여 있었다. 무겁고, 쓸모없고, 냄새가 났다. 내가 떠났던 시간이 그 안에서 썩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방을 질질 끌며 공항버스를 탔다. 창밖으로는 불빛들이 스쳐 갔지만, 그 어떤 불빛도 내게 향하지 않았다. 모두가 제 길로 가는 사이, 나는 다시 그 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아빠가 서 있었다.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보였지만, 눈빛엔 반가움도, 안도도, 심지어 분노조차 없었다. 차 안에서 엔진 소리와 함께 흐르는 건, 짧고 무거운 한숨뿐이었다. 그 한숨은 피로의 소리가 아니었다. 한 인간을 더 이상 감당하기 싫다는, 어떤 포기와 혐오가 섞인 숨이었다. “참, 너 키우기 힘들다.” 아빠가 말했다. 그 말은 대화가 아니라 선고처럼 들렸다.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창밖에 스치는 불빛이 전부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나는 도망쳤다. 그리고 도망친 자리마다 벌이 생겼다. 인도의 시장에서도, 교회의 식탁에서도, 지금 이 조용한 차 안에서도. 벌이란 누가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구도 나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아무도 나를 죄인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망망대해로 아빠를 버리고 떠났고, 살아있는 것의 거짓말을 계속했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것처럼, 행복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밥을 먹던 시간, 그 모든 순간이 여전히 내 죄였다. 차창에 비친 얼굴은 내 것이 아니었다. 잿빛, 무표정, 오래된 흉터처럼 남은 그림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도망은 끝났지만, 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도의 교회에서 보았던 그들의 신은 죄를 대신 지고 죽었다지만, 회개 없는 나는 여전히 그 죄를 안고 있었다. 그들의 신은 어떤 죄를 채우고, 또 어떤 죄를 잊었을까. 나는 살아있음의 거짓말 속에서, 내 죄를 여전히 묵묵히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