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우리 가족은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계신 가정이 되었다. 얼굴을 본 적 없는 친할아버지는 아빠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유년시절 같이 살기도 했던 친할머니는 16년 전
돌아가셨다. 병상에 계셨던 기억만 남아있는 외할아버지도 내가 열 살
무렵일 때 세상을 떴다. 그러니 머리가 커서 대학에 들어갔다고도 해보고
멋쩍게 안부 전화도 해봤던 관계는 외할머니 뿐이었다.
나의 외할머니는 작년 11월 5일에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워킹홀리데이로
호주 시드니에 있었다. 한국에서 호주로 간지 일주일이 안됐을 때였다.
아빠에게 할머니가 안 좋으시다는 전화를 받고, 통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혼이 빠져버린 엄마에게 연락하고 잠이 들었는데, 새벽 가족 카톡방에
아빠로부터 이렇게 보내면 되냐며 부고 사이트 링크가 올라왔다. 나는 내일
일정을 되새기며 아침에는 할머니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한국으로
가는 당일 비행기 표를 알아보고, 시드니에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례가 끝날 때쯤에야 겨우 도착 하겠지만 한국에 가겠다고, 가야 하지
않냐고 했던 것 같다. 그때 사실 엄마는 내가 오고 말고가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다. 카페를 나와 걸으면서
울었는데, 뭐 때문에 눈물이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엄마 옆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울면서 말했는데, 엄마는 정신이 없어 답해주지 못했고 끊으려고
하기에 엄마 들으라고 “엄마 미안해!” 하고 소리를 쳤다. 대답 없이 전화가
끊기니 곧 멍해졌다. 방금 뭘 한 거지?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말이었다.
엄마를 위로할 수도, 못 가서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할 수도, 할머니를
애도할 수도 없는 노력 없는 말. 마음이 가난해졌다.
결국 난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 할머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름이
미리 새겨져있던 장지에 합장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주된 원인은 음독이었다. 아마 다른 수가 있진 않았을
테고 농약을 드셨다. 몇 년 전부터 할머니의 몸은 쇠약해지고 있었다.
치매기가 있다고도 했다. 양손에 장애가 있는 큰삼촌이 전담해서 할머니를
모셨다. 당뇨 때문에 식단을 조심해야 했던 할머니를 큰삼촌은 자주
다그쳤다고 했다. 그날도 아마 단 음식을 잡숫고 싶어하셨을 것이고 다툼이
오갔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몇 주
전, 할머니와 큰삼촌이 잠깐 우리집에 머문 적이 있다. 각자 일로 바쁜
우리집 사람들은 일찍이 집을 나섰고 내가 마지막으로 나갈 차례였다.
할머니는 소파 한구석에, 삼촌이 그 반대편 구석에 앉았다. 나는 혼자
커피를 사마시기가 그래서 두 분께 커피를 사다 드리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당이 하나도 첨가되지 않은 쓰디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정말 맛있게
드셨다. 잘 갔다 오라는 인사를 듣고 두 사람을 두고 나오는데, 왠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댁에
계신 모습보다 우리집에 잠깐잠깐 오셨던 얼굴이 떠오른다. 몇년 전 엄마가
무슨 일로 바빴을 때, 우리집 제사에 올릴 전을 할머니가 대신 부친 적이
있다. 다 부친 전을 소쿠리에 담아 보일러실 찬장에 올려두었는데, 내가
덤벙거리다가 그걸 다 엎어버렸다. 그때의 감정은 죄송함보다, 모르는
사람에게 실례를 저지른 듯한 기분에 가까웠다. 수습 하려고 허둥대는 나
대신 할머니가 보일러실 찬 바닥에 떨어진 전을 주워 담았다. 돌이켜보면
그리 열심히 허둥대지 않았다. 할머니가 주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가수 송대관의 먼
친척이셨다. 눈꺼풀이 내려와 졸린 것처럼 검은자위밖에 보이지 않는 눈이
왜인지 똑닮아서, 난 그 사실을 알기 전부터도 두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생전에 송대관 씨는 방긋방긋 웃으며 해뜰날을 부를 때가
많았지만, 할머니는 좀처럼 웃는 날이 없었다. 할머니는 막내 이모가 늦은
결혼 후 낳은 손녀 예은이를 대할 때도 웃음기 없이 장난을 걸어서, 옆에서
보는 나는 할머니가 예은이를 혼내고 있는 건지 생각했다. 할머니를 가장
살뜰히 챙겼던 막내 이모는 가끔 곧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엄마는
예수님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몰라” 하는 말을 했었다. 할머니는
가만히 말을 않고 있다가 ‘병신 자식을 둬서 내가 죽어야지’ 라고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발달장애가 있는 둘째 삼촌이 가족 자리에 잘
참석하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만히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데,
엄마는 아무 말도 해줄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는 내가 못보던 얼굴로 변했다. 난 그냥 그걸
거대한 죄책감을 담은 표정이라 읽었다. 스물 남짓에 혼자 서울로 상경해서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아빠와 중매로 결혼한 엄마는 이후의 생을 경기
남양주에서 보내고 있다. 할머니 집이 있는 전북 김제에서 멀지 않은
장수군,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는 이모와 삼촌들을 생각하면 엄마는 늘
미안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막내 이모가 집 보일러가 고장 나서
우리집에 잠시 머물기로 했을 때 엄마가 아빠 눈치를 보면서 최선을 다해
방을 내어주려고 하는 걸 난 돕고 싶었다.
엄마가 사라질까봐 무서웠던 작년 그날이 지나고 이제 곧 11월 5일이 온다.
엄마는 그새 많이 괜찮아졌다. ‘떠올릴 때마다 슬퍼진다’는 말을 입 밖으로
할 수 있는 걸 보고 그렇게 짐작했다. 아빠는 11월 첫째주에 이틀 김제로
가는 걸 못마땅해 하고 있다. 주유비도 많이 들고, 당일로 가면 됐지 꼭 그
이틀을 가야 되겠냐는 말을 짜증 섞인 경북 사투리로 말한다. 가면
이모부들 사이에서 대장 역할로 말 제일 많이 할 거면서 뭐가 그렇게
싫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갈 때마다 비닐하우스니 화장실이니 시설
보수는 제일 잘했던 간판쟁이 아빠를 조서방, 조서방 하며 덕분이라고
말했던 할머니를 나도 아는데.
올해는 나도 같이 김제에 간다. 가서는 혹여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쓸 예정이다. 난 엄마가 할머니 생일마다 해달라는 안부
전화도 겨우겨우 했고, 글쓰기 모임이 아니라면 할머니를 떠올리며 울지
않았을 사람이니까, 그 정도 사람으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