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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기야 했다만

    숟갈을 싱크대에 던져놓고 책상에 돌아왔다. 아이스크림을 신나게 퍼먹을 땐 몰랐는데 키보드에 올려놓고보니 손가락이 몹시 차갑다. 이리저리 주무르고 히터 앞에 갖다대봐도 한번 차가워진 손가락은 좀처럼 덥히기 힘들다. 낮잠에 들기 전부터 아팠던 머리가 여전히 지끈거린다. 감기에 걸린 건 아닐까, 내심 바라며 이마에 손을 짚어본다. 손가락이 차가워서인지 이마가 평소보다 뜨겁게 느껴진다. 평소엔 이마가 어디 붙어있는 줄도 모르다가 이럴 때만 어의가 왕의 맥박을 짚듯 세심히 이마 구석구석의 온도를 살핀다. 화장대 서랍에 전자온도계가 있지만 절대 꺼내지 않을 것이다. 전자온도계는 다소 냉정한 타입이라, 내 마음이 이렇게 쉬고 싶다는데도 언제나 37.2도 따위로 대답해버리는 경향이 있으므로. 내일 출근해서 동료에게 감기를 옮길 수도 있으니 좀 쉬어야 한다는 타당한 결론도 떠오른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처럼 멀쩡할 것이다. 거뜬히 일어나 세수를 할 것이다. 투덜거리며 대문을 나서다가도 몇 걸음 걷다보면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런 아침 동안 나는 별 생각이 없다. 느닷없이 잠에서 추방된 것만으로도 얼떨떨해 눈을 비빌 뿐이다. 그러나 생각은 얼굴 붓기가 빠질 때부터 서서히 찾아온다. 빚쟁이처럼 머릿속에 들어앉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불안한 것도 다 이 빚쟁이들 때문이다. 하루라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다는 생각, 나만 하는 걸까? 지금 붙들려있는 생각 중 몇 개를 써보겠다.
  • 1. 월세 그만 벌고 싶다 (그렇지만 빨리 다음 달 프로그램 홍보해야지)
  • 2. 다음 달 프로그램 홍보가 늦었다! (게다가 이제 상세페이지를 전부 갈아 엎어야 하고)
  • 3. 세무사 찾아가야 하는데 어디에서 찾지 (가게 월세 송금 내역이 부가가치세 조정에 도움이 될까 하여)
  • 4. 합평반 동료작품 감상을 빨리 정리해야 해 (벌써 두 편이나 밀렸다. 정말 면목 없는…)
  • 5. 소설 수업에 제출할 단편도 써야 하는데 (한 편은 다듬고, 한 편은 새로 쓰고…)
  • 6. 모리 중성화 수술 예약해야지 (그나저나 회복 기간 내내 모리가 어떻게 몸을 핥지 못하게 할까…)
  • 7. 11월 29일 행사 준비해야지 (이름하야 ‘2025 연말정산 일년 발표회’. 규모와 장소, 인원 등…)
  • 8. 글방 책 이젠 진짜 정리해야돼 (글방의 엔트로피를 낮추기 위해 책을 집으로 옮길 계획이다. 대신 집의 엔트로피가 높아진다.)
  • 9. 이미 지난 친구 생일 축하 어떡하지 (일주일 전이었다. 알고 있었는데 정신없어 연락하지 못했다. 때를 놓치니 미안해져서 더 우물쭈물하게 되었다… 늦어진만큼 더 잘 축하해줘야 할텐데…)
  • 10. 겨울옷 정리 마무리 해야지 (정리를 하다 만 지금의 옷방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
     써놓고 보니 생각의 목록이라기보다 할일의 목록이다. 제때 처리하지 않은 일이 유령처럼 머릿속을 떠돌며 시시때때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답답해서 ChatGPT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매일 할일을 다 처리하는 거냐고, 나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ChatGPT는 ‘그럴 만해요. 지금 말씀하신 일들은 각각이 ‘하나의 세계’처럼 에너지와 집중을 요구하죠. 이걸 동시에 꾸려가려면 단순히 “열심히”로는 버텨지지 않아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하고 말한다. 이런 대답이 싫지 않다. 그럴 만하다고 우선 공감해준 뒤,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노력하고, 실질적인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뒤이어 ChatGPT는 “모든 일을 매일 조금씩”은 지속 불가능하다며 요일별 처리하는 일을 달리 해보라고 제안한다. 해볼 만하지. 특히 하루를 시간 단위로 계획하기 벅찬 나같은 사람에게는. ‘리셋 타임’도 제안했다. 매일 15~20분 동안 편히 쉬라는 이야기다. 듣고 싶었던 말이다. 쉬세요. 마음의 피로를 풀어보세요. 일이 많으면 하루에 하나씩 처리해보세요. 그런데 대체로, 듣고 싶은 말은 내게 도움이 안되는 말이다.

     결국 나는 저 일들을 모두 직접 처리해야 한다. 유령을 퇴치하는 방법은 그뿐이다. 하루에 하나만 처리하고 싶겠지만 여러 날 동안 여러 일을 찔끔찔끔 처리하며 고통받을 것이다. ‘리셋 타임’ 같은 거 잊은 채 정신없이 일하다가 침대로 겨우 기어들어갈 것이다. 누가 저 일을 전부 대신 해줄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를 수 있을까? <강철의 연금술사> 식으로 계산하자면, 양팔을 다 떼줘야 마땅하다. 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을 남에게 떠넘기려면 ‘나’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하니까. 혹은, 사랑만이 그 등가교환의 법칙을 능가할 수 있다면… 애인에게… 저 중 몇 개를… 아니 하나라도…

     묻지 않은 이런 일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것은 뻔하게도 변명을 하고 싶어서이다. 쫓기고 있어 마음에 여력이 없다고. 핸드폰을 보고 있더라도 그것은 소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생각으로부터 마비되고 싶어서라고. 스토리를 올린 건 긴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는 신호가 아니라고. 카카오톡이 도착하면 나는 그때부터 원시 시대가 그리워진다고. 이런 기분을 구구절절 모두에게 설명할 수도 없다고. 설명할 멘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더욱 속이 뒤집혀버린다고. 일어나 세수하고 모리를 챙긴 뒤 출근하고 회사일을 제때 해내는 것만으로도 큰 성취일 정도라고. 유일하게 간절한 것은 바로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을 극장에서 직접 보는 것뿐이라고. 할일 앞에서 소통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난다고.

     할일과 소통을 회사 체계에 빗대자면 사업팀과 커뮤니케이션팀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각 팀의 활동에는 결국 사업비, 그러니까 에너지가 필요하다. 사업비는 한정되어있다. 사업팀이 업무 처리(혹은 보류)에 사용한 사업비는 커뮤니케이션팀에서 잠시 빌려온 것이다. 커뮤니케이션팀은 단기 대출 요청하기가 제일 쉬운 곳이다. 소통을 잠시 미룬 대가는 대체로 비가시적이므로. ‘리셋 타임’ 없는 사업비 확충은 요원하여 대출은 결국 갚지 못한다. 커뮤니케이션팀의 에너지는 고갈된 지 오래이다. 이런 건 ChatGPT한테 어디서부터 물어봐야 할 지 모르겠다. 애초에 ChatGPT가 아니라 타인과 대화하며 해소할 일이라지만, 역량 저하된 커뮤니케이션팀은 그럴 여력마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