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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쓸모 있는

    매주 주말 새벽, 1분 간격의 알람을 10개 정도 끈 후 간신히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서울을 벗어난다. 땅이 어는 계절을 제외한 4월부터 11월까지, 8개월짜리 내 땅을 만나러. 사실 내 기준에서나 오전 9시가 새벽이지 사회통념상 새벽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시간이지만, 주말이니까 ‘사실상 새벽’이라고 치자. 내가 잠이 덜 깼다는 이유로 운전을 거의 떠맡는 남편은, 주말마다 이어지는 텃밭 행을 꾸준히 어이없어하는 중이다. 그냥 잠을 더 자면 될걸, 벌레도 기겁하는 사람이 왜 잘 하지도 못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취미를 이렇게나 거창하게 하냐고, 놀림과 감탄을 반반 섞은 코멘트를 매번 한다. 옆에서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차 안에서 텃밭으로 이동하는 시간 동안 그날의 작업계획을 세우고 역할분담을 한다.

     오늘은 전체적으로 잡초 제거만 해도 될 거 같은데, 이번 주에 비도 양껏 한번 왔으니까 물 많이 안 줘도 될 거 같고. 당근은 지난주에 솎아내기 충분히 했으니 이제는 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너무 빽빽해서 작게 영글면 미니 당근이라고 생각하고 먹지 뭐. 바질 모종은 그냥 뽑아 버릴까? 오늘 보고 최종 판단해야겠지만 회생 불가능일 거 같아. 그 농원에서 산 모종 다 별로네, 이제 거기 가지 말자. 그때 이웃 어머님이 주신 아욱은 두 줄기뿐이었는데 어쩜 그렇게 나무처럼 잘 자라나 몰라. 이번 주도 엄청 많이 자라있을 텐데 많이 잘라와서 된장국 끓여 먹자. 오늘 잎채소들 골고루 최대한 많이 수확해줘. 지난주에 잘라온 쑥갓이랑 로메인을 같이 먹으니 정말 맛있더라. 쪽파는 언제 수확할까? 근데 쪽파는 뭐 해서 먹어야 하지? 다행히 날이 흐리네, 일하기 좋겠다.

     전날 밤 텃밭 농사 블로그를 열심히 뒤지며 캡처하고 메모한 내용과 서울시에서 나눠준 안내 책자도 살펴 가며 이미 바쁘다. 3평 남짓한 농사에 마음만은 대농이다. 올봄 텃밭을 분양받으며 농사를 짓게 된 이후 줄곧 이어지고 있는 일상이다.

     마흔이 되니 (그나마) 잘 하는 것, 익숙한 것에 집중하는 삶이 합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앞으로의 쓸 만한 세월이 짧을 수 있다는 예감 때문인지, 남아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굳이 새롭게 부딪치고 익히는데 써야 하나 하는 회의가 자주 스며든다. 같은 이유로 여러 가지 새로운 일을 시도하거나 배우는 것을 최대한 하지 않고 있다. 나이가 참 좋은 핑계다. 대표적인 예가 엑셀. 임금소송같이 원고가 여럿인 다수당사자 소송을 할 때 엑셀이 쓸모가 많기는 한데, 초등학생 때 컴퓨터활용능력 시험을 치며 익힌 수준으로 여태 버티고 있다. 발제나 강의할 때 파워포인트도 많이 쓰는데, 남이 만들어 놓은 양식에 글만 얹어 쓰는 수준이다. 전지에 두꺼운 매직으로 글을 써서 칠판에 붙여 발표하던 시절이 있었다면 믿으려나 모르겠다. 다행히 이 업계에는 나보다 심각한 수준의 변호사도 가끔 보이기 때문에, 그런 데서 위안을 찾으며 뒤처진 상태에 안주하는 중이다. 잘하는 사람들 많으니까 정말 필요할 때는 도움의 손길을 구할 수 있도록, 두루두루 사이좋게 지내자를 모토로.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매주 교외로 향하며, 왜 하는지 모르겠는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이다. ‘할 일 목록’(To Do List)에는 약 10년 전부터 텃밭 농사가 적혀 있었다. 다만 그 목록은 내 인생의 온갖 미련과 후회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곳이어서, 거기 적혀 있는 것을 현실로 불러 올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중에는 장롱면허 탈출하기 같이 20년간 목록에 있다가 최근에서야 간신히 현실이 된 일도 있고, 서랍에 가득한 외장하드 정리, 베란다에 쌓인 서류박스 정리 같은 아마도 향후 10년 이상은 더 목록에 있게 될 묵은 과제도 많다. 소설 쓰기, 무술 배우기 같이 손에 닿을듯한데 지난 10년간 안됐으니 앞으로도 기약할 수 없는 희망 사항도 가득이다. 어디 그뿐인가. 변호사 의무연수 목록 중 업무에 참고하려 찜해둔 양질의 강의부터 국내외 대학들이 무료로 열어둔 강의 중 환경보건, 미국정치처럼 흥미와 관심을 좇아 발견한 수업들, 현실을 무겁게 반추할수록 시작할 마음을 일으키지 못해 쟁여두기만 한 영화들, 이제는 구체적인 필요가 없음에도 왠지 계속해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외국어 공부, 세상에 나와줘서 고마운 책이지만 매일의 독서 선택에서 밀려 내 책장과 교보문고 장바구니에 가득 쌓여있는 세어볼 엄두가 안 나는 책들까지 다 하면, 실제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기능하는 목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상에서는 소화하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흘려 버리지는 못해 고여있는, 일종의 미련의 실체들.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장갑과 팔 토시를 낀 채 농장 초입에 위치한 12번 밭, 거기에 쪼그려 앉아 있을 때가 한 주 중 가장 평화롭다. 고요한 공기 속에 잡초를 뽑고 채소를 똑똑 따고 물을 길어 나르고 있으면, 이걸 기르고 수확한 후 씻어서 먹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된다. “여기 왔다 갔다 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사 먹는 것이 훨씬 더 싸다”는 일꾼의 잔소리를 꾹 참아가며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다. 모든 일상이 빠짐없이 시장에 맡겨져 있는 삶에서, 아주 작게나마 내 손에 만져지는 구체적인 일상을 짓는 일. 지금 당장은 자동차를 타고 기름을 태워가며 교외로 나가야 하지만, 이렇게라도 몸으로 만드는 삶의 기술을 익혀가고 싶은 마음. 말과 글로 노동하는 사람으로서, 때로는 내 노동의 결과가 허공에 흩뿌려진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질 때, 손과 발에 닿는 흙과 눈앞에 현존하는 식물에 기울이는 시간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지난 주말에는 조금 이르지만 쪽파를 전부 수확했다. ‘쪽파 요리’를 검색하고 있는 나를 불쌍히 여긴 동네 언니가 그 쪽파 갖고 오라고 하더니 파김치를 담가줬다. 이거면 된 것 아닐까. 비록 답이 안 나오는 관료들과 마주 앉아 협의랍시고 몇 달째 매주 몇 시간씩 떠들어도 아무런 소득이 없지만. 재판에서 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명예도 체면도 없는 이들을 향해 또다시 힘없는 말과 글을 쌓아 올려야 하는 속 터지는 날들이지만. 이 와중에 그렇게 바라던 텃밭 농사의 꿈은 이뤘지 않나. 올해 이렇게 살아본 덕에 내년에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능숙할 수 있다면, 꽤 쓸모 있는 시절이지 않은가. 엊그제 라면을 끓이며 꺼내먹은 파김치는 아직 덜 익어 알싸하던데, 한 통을 천천히 익혀 이걸 씹어 먹는 동안은 힘을 좀 내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