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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개와
느릅나무
낙엽

    우리 집에 개 한 마리가 있다. 이 개는 일어서서 내 팔꿈치를 물 수 있다. 개가 코에 박치기하면 이삼 초간은 주저앉게 된다. 개는 높은 책상에서 떨어져도 벌떡 일어난다. 꼬리는 개의 기분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공원을 뛰어다닐 땐 세상을 지휘하듯 흔들리던 꼬리는 간식을 기다릴 때 빗자루가 되어 바닥 먼지를 쓸어담는다. 신발을 물고 뜯어 고함을 지르면 신발을 문 채로 꼬리를 흔들며 도망간다. 분주한 꼬리와 젖혀진 귀, 살랑이는 엉덩이로 보아 이 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즐겁게 살아가는 듯하다. 흥분해 사료를 토하거나 낯선 사람에게 겁을 먹더라도 뒤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뛰어올라 허리를 깨문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도 바짓가랑이를 북북 뜯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은 웃지만, 나는 볼이 조금 붉어진다.

     마침 가을이다. 낙하하는 것들 덕분에 온 세상이 놀이동산이 되는 계절. 나뭇가지 하나를 씹어 부수고 나면 다음 나뭇가지가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낙엽을 던져도 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쏟아지는 가을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뜬 개는 코를 킁킁대며 바람의 고향을 가늠한다. 이슬 맺히는 백로 지날 무렵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으로 이사 온 개는 이제 입동을 거뜬히 견디고 첫눈을 기다리고 있다. 8개월가량이라던 강아지 발바닥에 굳은살이 전혀 없어 놀랐던 것도 벌써 두 달 전. 통증을 견디고 산책에 나선 덕분에 이제 개는 어디든 뛰어오를 수 있다. 가고 싶은 방향으로 망설임 없이 달음질친다. 앙상했던 몸에 붙은 근육은 다부지게 갈라졌다.

     개의 이름은 모리다. 개는 예전에 내가 그린 만화 캐릭터를 닮았다. 그 캐릭터 이름이 모리였다. 내가 만든 캐릭터와 닮은 개라니, 신기해서 자세히 보다 화면 너머로 정이 들었다. 개 없는 삶에 적응하지 못하던 참이었다. 어릴 적부터 개와 살았다. 내 집은 없어도 내 개와 고양이는 있었다. 그래서 내 개와 고양이가 머무는 곳을 내 집으로 삼았다. 개와 고양이의 이름은 내가 돌아갈 곳의 주소였다. 그 주소는 마루였고, 호두였고, 반고였고, 란마였다가 이제 째즈와 모리가 되었다. 그래서 모리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이기도 했다. 나를 살게 해준 개와 고양이들의 기억을 이 어린 개에게 붙였다. 이 개는 그저 저 자신일 뿐인데 얼떨결에 그 이상을 강요받았다. 이 개를 보며 한숨쉬거나 눈물짓는 것은 그래서 부당하다. 이 개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튼간에 나는 이 개를 모리라고 부른다.

     때로는 모리가 부럽다. 개의 삶이 부럽긴 이번이 처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리는 도통 주눅이 들지 않는다. 어린 모리는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 날뛴다. 궁금해 모든 걸 들쑤시고 세상을 잊은 채 몰입한다. 같은 속(Genus)에 속하는 포유류를 만나면 멀리서부터 반가워 눈을 떼지 못한다. 개가 이렇게 선명한 감정을 표현하다니. 나도 한때 누렸을, 그러나 오래전 그 시절에 두고 떠나와 버린 감정을 모리는 매 순간 순도 높게 발산한다. 자신의 기분에 충실한 이 개를 란마도 부러워했을까. 부당하다고 했지만, 모리를 두고 나는 란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란마는 2017년 보호소에서 점지해 준 개였다. 봉사자끼리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내가 말해둔 개를 누가 당일 입양해 갔고, 대신 얘는 어떠냐며 권해준 개가 란마였다. 입양 준비로 차도 렌트했고, 선택보다 운명이 가족을 만들지 않겠냐는 생각에 그대로 보호소에 갔다. 보호소 뜬장에서 반년 정도를 버텼다던 란마는 몹시 더러웠다. 털 깎기 싫어 도망갔던 양을 몇 년 만에 만나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푸들의 곱슬 털은 엉키다 못해 단단한 갑옷이 되어 있었다. 란마를 받아 든 그대로 동물병원에 직행해 털부터 벗겨냈다. 갑옷을 밀어내고 나니 앙상한 개가 낯선 공기에 발발 떨었다. 란마는 여생 동안 많은 것을 두려워했다. 수의사마다 란마의 나이를 다르게 진단했기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의 란마는 다섯 살이기도 했고 여덟 살이기도 했다. 나는 함께 사는 내내 란마가 올해 몇 살일까 궁금해했다. 언제나 강아지라고 우겼지만 란마는 매년 조금씩 느려졌다. 그리고 끝내 연령미상으로 죽었다.

     란마와 모리가 닮은 점이 하나라도 있을까. 둘은 발톱 색마저도 다르다. 혈관을 피해 깎기 쉬운 모리의 투명한 발톱과 달리 온통 검은색이라 꼭 한번은 피를 흘리게 했던 란마의 발톱. 돛처럼 높게 솟은 모리의 꼬리와 오락실 스틱처럼 흔들리던 란마의 꼬리. 란마는 오로지 내 손만 가지고 놀았다. 양말이라도 던질라치면 기겁해 도망갔다. 모리는 오토바이와 버스 뒤도 쫓아간다. 란마는 내킬 때 사료 몇 알을 먹고 돌아섰지만 내가 먹는 음식만큼은 부가세처럼 꼭 자기 몫을 요구했다. 모리는 사료 한 그릇을 삼키고도 하루 종일 굶은 얼굴로 사료 봉투를 바라본다. 란마는 종일 품고 있어야 했지만, 그것 말고는 원하는 것도 없었다. 모리는 때로는 입에 문 신발과 앞에 놓인 간식 중 무엇이 더 간절한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

     이 어린 개처럼 란마도 세상을 놀이터로 여기던 때가 있었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삶 반쪽에서 란마도 내키는 대로 놀다 지쳐 잠에 든 날들이 있었을까. 불안과 긴장보다 다른 기분을 더 크게 느끼던 때가 단 두 달이라도 없었다면, 란마는 모리를 질투했을까.

     의인화는 부질없는 상상이지. 란마는 란마대로 평온한 낮잠을 즐기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자다 깬 모리가 켄넬에서 나와 내게로 걸어온다. 나는 허리 숙여 두 손바닥으로 모리의 몸을 쓰다듬는다. 모리가 내 품에 얼굴을 묻으며 엉덩이를 들썩인다. 란마는 그저 들어 올려 안아주면 그만이었다. 안아준 대가로 나는 란마의 얼굴을 붙잡고 억지로 뽀뽀를 했다. 그러면 란마는 답답해 고개를 팩 돌렸다. 모리가 하품하며 다시 켄넬로 돌아간다. 란마는 내 팔에 턱을 괴고 잠에 든다. 란마가 잠든 얼굴이 궁금해 나는 핸드폰을 켜고 셀카 모드로 사진을 찍는다. 모리는 허벅지를 핥다가 도로 벌렁 눕는다. 란마는 아주 가볍기 때문에 얼마든지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십 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팔이 아려온다. 모리 잠꼬대 소리에 놀라 나는 고개를 돌린다. 마당에 느릅나무 화분이 있다. 그 나무 아래에 란마가 있다. 느릅나무 이파리가 노랗게 말라 있다. 곧 마당에 낙엽이 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