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마주 앉았다. 탁자 위에 올려진 그와 그녀의 손끝 사이의
거리는 20센티 남짓했다. 커피잔의 받침을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손 옆에는
샛노란 프리지어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달래줄 때면
프리지어를 선물하곤 했다. 곁에 있는 꽃은 건네지도 못한 채 남자는 벌써
30분이 지나도록 한시도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시선은
여자에게 고정한 채.
여자는 남자를 보지 않았다. 창밖을 멍하게 보다가 프리지어를 슬쩍 봤다가
남자의 커피잔을 봤다가 자신의 커피잔으로 시선과 손을 옮겼다. 여자는
공간의 모든 곳을 봤지만 남자의 얼굴만은 보지 않았다. 물건을 따라
옮겨가는 시선과 커피를 향하는 손 말고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얼음이
녹아 물이 가득해진 잔에서 찰그락거리며 뱅뱅 도는 얼음만이 여자가
소유한 것 중 유일하게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또 뭐가 문젠데.”
남자가 입을 뗐다. 메마른 입술이 쩍하고 갈라지며 목소리도 함께 갈라져
쇳소리를 냈다. 남자는 큼큼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커피 좀 줄이라니까. 여자는 남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혼자
생각했다. 남자는 물은 하루에 한 잔을 겨우 마시면서 커피는 대여섯 잔씩
마셔댔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남자는 한여름에도 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여자는 한겨울에도 늘 차가운 카페모카를 마셨다. 그것도
휘핑크림이 가득 올라간 커피를 말이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보며 멋있다고
했고 남자는 여자에게 귀엽다고 했다.
‘또’라는 단어보다 목이 멘 그의 모습이 먼저 신경 쓰이는 걸 보니 이제
정말 자신이 화해할 준비가 되었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제야 여자는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눈이 마주친 남자는 커피를
홀짝이다 쿨럭하고 기침을 내뱉었다.
“우리 화해하자.”
여자가 표정 없이 남자를 향해 말했다. 남자는 정말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에 또 화가 난 듯 했지만 우리가
싸운 적이 있던가? 남자는 생각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앞서 또 뭐가
문제냐 물은 것도 내뱉고서 아차 했다. ‘또’라는 말. 여자와 남자의 주된
말다툼 거리였다. 남자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며 미지근해진 커피를
마셨다.
“너를 놓아주기로 했어.”
“뭐?”
남자의 되묻는 목소리가 삑 하고 올라갔다. 여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헤어지자고.”
“그러니까 왜?”
남자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또다. 늘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상하면
헤어지자고 말하는 버릇.
“사전에 화해라는 단어를 검색해 봤어. 너가 잘하는 거 있잖아.”
*
여자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자를
욕한다기보다는 일종의 대화였다.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다 하는 거지.
나는 푸념하고 친구는 맞장구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남자는 그런
여자와 친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나쁜 얘기에 맞장구를 치냐고.
“지는 무슨 세상 모든 일을 다 아나 봐.”
“걔 아직도 그래? 검색하는 거.”
남자는 집요하고 강박적인 구석이 있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정보에
대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행동. 사소한 단어에서부터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들까지 단어의 정확한 뜻은 사전을 봐야 직성이 풀렸고 항간의
떠도는 이야기는 출처를 명확히 알아야, 그것도 신뢰할 수 있는 매체를
통한 것임을 확인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여자가 가끔 잘못 말할 때나
상식에 준하지 않는 말을 할 때면 늘 그것을 바로잡아줬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희 또 화해는 언제 할 건데?”
친구가 물었다. 여자는 술잔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친구를 바라봤다.
“또?”
“그래. 아니, 화해라기 보다는 네가 화를 푸는 거겠지. 이번에는 뭐 때문에
화가 났던 건데? 기억은 하냐?”
친구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왜 화가 났냐고?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싸웠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요즘 남자를 만나면
화가 나는 일이 잦았다. 여자는 남자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이미 식어버린
거겠지. 그래도 화해는 해야겠지? 여자는 답답한 마음에 사전에서 화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남자가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었다.
화해.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앰.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푸냐고 어떻게 없애냐고 사전에 묻고 싶었다.
검색창을 쭉 올렸다. 관용구. 화해를 붙이다. 어릴 적 동생과 싸우면
엄마가 둘의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마주 보게 한 뒤 나누던 그것이었다.
유의어. 시담. 화회. 해방.
해방? 여자는 해방이라는 단어를 보자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완전한 화해는 서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여자는 결론을
지었다. 그에게서 해방되기로 그리고 그를 해방시켜주기로.
*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곧이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작게 코웃음을
쳤다.
“너와 나 사이 사랑의 속도가 달랐나 봐. 우리의 접점은 시작했을 때밖에
없던 것 같아.”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에 맺혔던 물방울들이 흘러내려 코스터를
적셨다. 어느새 꼼지락거리던 남자의 손이 멈추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사랑의 속도라고? 그런 이야기는 또 어디서 들은 걸까. 정말 두 사람 간
사랑의 속도를 그래프로 그린다면 시작 이후의 접점은 없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남자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켜 화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유의어. 그가 찾은 어디에도 해방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시담. 화회. 그리고 해빙만이 있을 뿐이었다. 단어의 뜻. 그거 한 번만 더
눌러보면 될 텐데 또 보고 싶은 것만 봤구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게 식은 커피잔 옆의 프리지어 꽃다발이 창문
사이로 비추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