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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老眼)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우리가 눈을 감고 있을 때도 우리의 눈은 계속해서 바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요. 꿈이 생겨나는 REM(Rapid Eye Movement)수면 단계에서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초당 1~5회 안구 운동이 관찰된다고 합니다. 감은 눈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요?

     나는 간혹가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거창한 메시지를 접하면 흠칫 놀라곤 한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언제부턴가 슬픈 일을 겪어도 눈물이 잘 안 난다. 차분히 돌이켜보면, 갑자기 그렇게 된 건 아니다. 렌즈를 낀 채로 기절하듯 잠에 들어 16시간 뒤 일어났던 그날 이후로 눈물이 사라졌다. 안과에 찾아갔더니 안구건조증이란다. 흔하디흔한 현대인의 질병, 안구건조증. 평소에 휴대폰 많이 하세요? 특히 겨울철에 히터 많이 쐬면 그래요. 의사 선생님의 말투 역시 건조했다. 버석버석하고 메마른, 사막 같은 눈을 여럿 본다면 피곤하겠지.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뻑뻑해 죽겠다. 눈꺼풀이 평소보다 힘 좀 써야 한다. 얼른 처방받아 온 인공눈물을 넣으니 그제야 눈에서 물이 흐른다. 꼭 슬퍼서 우는 사람 같다. 궁금한 게 있다. 얼마나 슬퍼야 슬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들은 다 이런 것쯤 그냥 꾹 참고 견디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힘들어하는 건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힘들어하는 건 힘든 축에도 속하지 못해서 힘든 게 아닌 건가?

     우리 집은 언덕 위에 있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은데 가끔 이 경사가 숨이 막히게 다가올 때가 있다. 저기 담벼락 너머로 툭 떨어진 감이 떼구르르르 굴러와 내 오른발을 '탁' 치고 돌아갔다. 아직 푸릇한 땡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을이 오려면 아직 멀었으니. 너는 왜 무리에서 혼자 떨어진 건데? 떨어진 감은 좀 더 굴러가더니 하수구에 걸려 박혀버렸다.

     나는 노안이다. 중학생 때부터 선거철에는 꼭 지하철역 앞만 지나면 기호 1번, 2번 후보자들의 홍보 포스터를 받아왔다. 쟤네한테는 안 줬으면서! 분했다. 먼저 가던 애들이 뒤를 흘끔 돌아보고는 나도연이 그럼 그렇지, 하며 킥킥 웃었다. 반에 도착해서도 내 손안에서 약간 구겨진 포스터를 냅다 뺏어가더니 선생님께 펼쳐 보이며 마구 웃어댔다. “선생님, 나도연 요 앞에서 명함 받았어요!” 분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얼굴만 붉혔다. 참나, 너네는 안 늙나 봐라. 톡 쏘아붙여 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참았다. 또 나댄다는 말을 들을까봐. 나는 목소리가 크지도 않고, 그닥 자기주장이 강하지도 않은데 이름 때문인지 뭔 말만 하면 ‘나도연 또 나댄다’는 식의 억까도 많이 당한다. 초등학생 땐 이름 때문에 너무 놀림받은 나머지 엄마에게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냐고 울며 짜증을 내기도 했었다.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가 지은 거 아니라고만 했다. 눈물은 스스로 닦아야 했다. 그치만, 얼굴은 엄마랑 똑 닮았는걸. 첨언하려다 엄마가 싫어할까봐 삼킨 말이다. 겉으로 보이는 ‘나’와 나의 내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지금껏 그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나의 그런, 나이들어 보이는 겉모습만 보고 성격도 그럴 것이라 넘겨짚을 뿐이었다. 학원 가는 길에 뜬금없이 이런 부탁을 하는 녀석도 있었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야, 나도연. 부탁이 있는데 요 앞 편의점에서 담배 하나만 사다 주라.”
     “뭐? 안 돼.” “야, 왜~ 궁금하단 말이야. 사례비까지 얹어서 줄게.”
     “됐거든. 내년에 성인 되니까 그때 피우든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아아, 딱 한번마안~~~”
     “안 된다니까?”
     “왜?”
     “나 저기서 일한다고. 짤릴 일 있냐.”

     먼저 저벅저벅 걸어서 가니까 금방 쫓아온다. 호기심에 가득 차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야, 너 편의점 알바도 해? 그거 불법 아니야?”
     “어. 아니야.”
     “거기 막, 그… 콘돔도 사 가냐?”
     “...몰라, 그런 거.”

     그딴 질문이나 하다니, 김현우는 역시 바보다.

     첫 인스타 아이디는 채린이가 1초만에 정해줬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그 애의 자리 주변에만 아이들이 우글우글하길래 지나가다 호기심에 들여다본 것뿐인데. 채린이가 주변을 둘러싼 그 많은 인파 속에서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간택당했다고나 할까.

     “이름이 뭐야?”
     “나도연.”
     “그럼, 인스타 아이디는 이렇게.”

     엄지손가락만 한 포스트잇에 적어준 글씨를 들여다봤다. 잉크가 빠르게 말라가고 있었다.
    @metoo.kite.
혹시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이나 ‘_’를 넣으면 된다고 했다. 말끔하지 못해서 싫으면, 숫자를 넣으면 된다고. 너 생일 언제야?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내 이름, 인스타 아이디, 출생 연월일이 몇초 만에 털렸다. 그렇게 쉽고 빠르게 내 개인정보를 털어간 사람은 채린이가 처음이고, 그럴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다. 과연 전채린. 남다른 친화력의 소유자. 첫인상도 좋고, 밝은 데다 붙임성도 좋아서 1학기 회장 자리를 반드시 꿰차는 대단한 친구. 색깔로 비유하자면 노란색 같아서 나랑은 안 어울리는데, 채린이는 자꾸만 어둑어둑해지려는 나를 항상 먼저 챙겼다. 준비물은 있는지, 숙제는 다 했는지. 선생님도 아니면서 그런 걸 자꾸 캐물었다. 우리 엄마도 안 그랬는데. 우울해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았다. 채린이의 과도한 관심이 솔직히 말해 가끔은 버거울 때도 있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고 빈칸으로 두고 싶은 마음을 꺼내고, 들여다보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말로 풀어내라고 할 때 특히 그랬다. 그래도 그 애의 넓디넓은 오지랖에 자주 빚을 지고 있었단 생각도 든다.

     언젠가 학기 초였나. 출석을 부르던 선생님이 전채린은 공손하고, 나도연은 건방진 느낌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전’ 씨는 예의 바른 느낌, ‘나’ 씨는 으스대는 느낌이라고. 글쎄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차마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나는 그런 말을 면전에다 들어도 웃어넘기고 마는 사람인데. 조금도 웃기지 않았지만 웃으라고 그런 말한 거 아닐까 해서. 채린이는 그런 나더러 착해서 그렇다고 했다. 아닌데. 난 착하지 않은데. 싫은 걸 싫다고 말도 못 하는 멍청이라서 그런 건데. 나와는 다르게 감정 표현이 확실하고 솔직한 채린이는 나 대신 화내주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그랬고, 약간의 설전 끝에 “농담으로 한 말인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라는 언짢음이 묻어나오는 사과를 얻어냈다. 더 기분이 안좋아졌지만 나는 그냥 또 입꼬리만 당겨 웃을 뿐이었다. 울 수는 없잖아. 울 일도 아닌데. 그렇게 하고싶은 말을 삼켜내면 조금씩 까맣게 그을음이 생긴다. 답답함이 커진다. 채린이가 부러웠다.

     아무래도 공부에는 별 흥미가 없다. 재밌지도 않고, 재능도 없다. 이젠 정말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이번 시험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번번이 변변치 못한 점수를 받자 딱 포기하고 싶었다. 반 밖에 동그라미쳐지지 않은 시험지를 구기고 찢은 다음 교과서도 같이 불태우고 싶었다. 학교 뒷편 공터에서 교과서를 높이 쌓아놓고 캠프파이어처럼 불지르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자꾸 이게 정말 너의 최선을 다한 게 맞냐고 한다. 선생님도 그렇고, 같은 반 애들도 나를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다들 수근거리는 것 같았다. 1번부터 틀렸대. 저것도 모르냐, 멍청아. 순식간에 현실로 끌려왔다. 대답을 해야 한다. 입술이 달싹거리더니 힘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 한숨을 쉬더니 다음 번엔 더 열심히 하라고 한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힘이 실려있었다. 격려였겠지만 필요없었다. 왜 자꾸 다음 기회가 주어지는 거지? 난 그만하고 싶은데. 여기서 더 잘해낼 자신 없는데. 내 한계를 내가 정해야 포기할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물었다간 별난 애 취급 받을 게 뻔하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더 열심히 해보겠다는 식으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한다.

     한계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비굴하게 회피했지만, 그렇더라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공부엔 재능이 없다. 공부는 못 하겠다. 그러면 빨리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럴 돈도 시간도 기회도 없어서 비관에 빠졌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하는 건 바로바로 부정적인 생각. 채린이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뜬금없이 “알바 할래?”라고 제안했다. 경험적으로 미루어봤을 때, 나를 제일 잘 아는 데다 눈치도 빠른 채린이가 종종 막다른 길에 서 있는 나에게 불쑥 내민 동앗줄은 거의 다 도움이 됐다. 어차피 시간도 남는데 용돈벌이하면 좋겠다 싶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채린이 제안이니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채린이 아버지께서 점장으로 계신 편의점. 일을 배울 때 점장님 옆에 채린이가 나란히 서서 지켜보고 있어 진땀을 좀 뺐다. 다행히 기억력이 좋고 손이 야무지다는 말을 들었다. 휴... 편의점은 선입선출이 핵심. 메모장에 적어놓은 체크리스트를 보고 또 봤다. 이런 마음으로 공부했으면 뭐라도 됐을까? 아니, 아무래도 무리지.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포기해도 정말 괜찮은지 궁금했다. 미련 없이 놓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터진 감이 물컹하게 밟혔다. 여기도 감나무가 있네. 찐득하게 엉겨 붙는 감각이 이질적이라 신발 밑창을 바닥에 몇 번 문질렀다. 지난여름 덜 익은 땡감이 내 발을 '탁' 치고 아래로 굴러갔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벌써 날이 추워졌다.

     ‘앞으로 어디 가도 엄마 있는 척해.’

     엄마가 고개를 떨군 나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었다. 뭐라고?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엄마가 없는데 어떻게 있는 척을 해? 바로 반문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영영 떠나는 거야? 어디로 가는데? 그때 나는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중학생이면 알 거 다 알잖아. 눈물도 나지 않았다. 왜 안 알려주는데? 안 찾아간다니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맴돌았다. 그날 기절하듯 잠들었는데 정신이 하도 없어 렌즈를 낀 채였다. 꿈속에서 끝없는 허공을 헤맸다. 어딜 가는지도 뭘 찾는지도 모르는 채로 헤매야 했다. 감은 눈은 바쁘게 움직여봤자 아무것도 발견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나만 두고 떠나버렸다.

     편의점 일을 좀 해보다 알았는데, 천만다행인 건 이 편의점에는 치킨도 없고 오뎅도 없다는 것이다. 호빵이 있긴 한데 겨울에만 나오니 이 정도는 애교지. 옆 편의점에는 치킨, 오뎅뿐만 아니라 군고구마까지 팔아서 고구마 특유의 달큰한 냄새가 바깥까지 아주 진동을 한다. 그에 비해 아주 점잖은 우리 편의점. 있을 것만 있다. 그래서인지 지나가는 길에 담배를 사 가는 사람이 제일 많다. 카운터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바로 건널목이 있고, 그 옆 전봇대에는 늘 현수막이 걸려있다. 현수막이 은근히 자주 바뀌는데, 대부분이 정치적인 내용들이다. 정치인 얼굴과 당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고, 상대방을 저격하고 힐난하는 발언이 꼭 소음공해처럼 느껴져서 봐도 못 본 척했었다. 그런데 왜 그럴 때 있지 않나, 갑자기 무언가 발견하는 날. 그날은 포스터가 윽박지르지 않았다. 동그랗고 얌전한 글씨체로 “미래 진로 설계 멘토링 특강”이라는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 아래에 적힌 내용들이 더 마음을 동하게 했다. 선착순이고 무료. 장소도 바로 여기 근처 문화센터. 현수막의 상태로 볼 때 방금 걸린 듯했다. 바로 휴대폰을 들어 현수막에 찍힌 번호를 번갈아 보며 문자를 남겼다. 새로 들어온 물류 목록을 체크하고, 흐트러진 라면 봉지를 다시 반듯하게 정리하고 있을 무렵 조끼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문자다. 신청 완료되었습니다.

     현우와 집 가는 방향이 같았다. 처음엔 그것도 모르고 따라오지 말라고 시비 걸었었는데… 알고 보니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좌회전하면 현우네, 우회전하면 우리 집. 나처럼 공부도 못하면서 왠지 모르게 여유로워 보이는 김현우. 당최 저 애는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궁금했다. 헉헉대며 오르막을 기어 올라가는 옆모습을 힐끔 봤다.

     “야.”
     “어?”
     “너 졸업하면 뭐 할 거냐?”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이 웃겼다. 좀 갑자기긴 해. 그래도 곧 졸업이잖아. 졸업하면 바로 사회에 내던져질 텐데 영 막막해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현우가 잠깐 쉬었다 가자며 손짓하길래 옆으로 빠졌다. 앉을 곳은 딱히 없어서 볼록하게 난 담벼락에 나란히 기댔다. 남색 트럭이 덜커덩거리며 지나갔다. 매연이 훅 끼쳤다. 무심코 시선을 올려다보니 다 익은 주홍빛 감들이 가지에 주렁주렁 달려있다. 하늘은 파랗다. 아직도 현우는 헉헉거린다. 숨을 고르던 현우가 좀 진정이 되자 기다렸던 질문에 답한다.

     “음, 글쎄. 대학… 가려나?”
     “너 수능 볼 거야?”
     “아니.”
     “나도.”
     “재수학원 고?”
     “됐어, 무슨…”

     현우와 채린이는 내 가장 큰 비밀을 아는 유일한 친구들이다. 이들 앞에서는 구태여 ‘엄마 있는 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둘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다. 채린이는 현실적인데 현우는 공상 속에 사는 것 같다. 말라서일까? 현우의 두 발은 언제나 땅에 붙어있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딱히 없고, 담배 피워보고 싶다는 철없는 얘기나 하고. 어릴적 천식을 앓았대서 부모님이 그뒤로 담배만큼은 절대 금지시켰다고 했는데, 사연을 듣고보니 좀 짠했다. 지금은 괜찮은 거 맞아? 했더니 그렇다고 아주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렇게 담배가 중요한지 물었더니 ‘그래야 어른이 될 것 같아.’ 란다. 어른이 뭐길래.

     눈이 다시금 뻑뻑해져서 지난번 안과에서 처방받은 안약을 한두 방울 넣었다. 안약 껍데기 입구를 비트는데, 거기 미세 플라스틱이 섞였을지도 모르니까 처음 한두 방울은 꼭 땅바닥에 버려야 한댔다. 나에게 이런 사소한 것을 알려준 사람도 역시 전채린. 너 눈 좋잖아, 그런 건 어떻게 알아? 했더니 라식한 거랬다. 언제 했대. 자연스럽네. 인공눈물을 넣고 부예진 시야로 채린이를 다시 쳐다보니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우는 건지 화가 난 건지, 아님 둘 다인 건지. 채린이가 놓고 간 한마디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 가만히 보면 너도 참... 되게 무심하다.’

     뒤늦게 외양간 고치는 마음으로 떠올려보면 그때 당시 채린이는 건강상의 이유로 눈 수술을 하고 일주일이나 학교를 쉬었었다. 학교에서는 평소와 같이 밝게 지냈지만 수술하기 전날 집으로 가는 길, 나를 붙들고 ‘실명하는 거 아니겠지?’하며 겁에 질렸었던 채린이가 뒤늦게 떠올랐다. 잊었다는 게 말이 되나.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 애 얼굴을. 내가 채린이였어도 배신감이 들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누구보다 나의 변화를 빠르게 알아차리고, 나도 미처 몰랐던 나의 마음까지도 알아주던 고맙고 소중한 친구였는데. 나는 나 때문에 상처받은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다. 처음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나 때문에 화가 나고, 서운해하고, 또 그렇다는 걸 표현했던 적은. 서먹해진 관계를 되돌리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대로 방치했다. 그런 회피가 나에게도 상처가 되는 줄 몰랐다. 미안해서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는 건 핑계겠지. 그렇게 채린이와 허무하게 멀어졌다. 덕분에 시작했던 알바도 미안한 마음에 그만두게 됐다. 미안하다고 말은 못하고 뒤돌아 나갔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라는 쪽지와 편의점에서 산 뜨뜻한 꿀물을 두고 가는 것. 그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안함이었다.

     잔뜩 기대하고 갔던 진로 체험 특강은, 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이비였다. 친절한 얼굴로 다과를 내올 때까지만 해도 두근거렸다. 누군가 나의 막막한 앞날에 길잡이가 되어줬으면 했다. 이렇게 하면 된다고, 길을 알려줬으면 했다. 미래가 정해져 있었으면. 인터넷 사주라도 보고 싶었는데 미성년자는 뜨지도 않았다. 강의가 시작한지 한 시간쯤 지나니 내용이 점점 묘하게 강요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관계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내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엔 오늘 강연과 관련한 자료를 보내주겠다며 생년월일과 휴대전화 번호를 적으라고 했는데, 그때까지 나를 어른으로 착각했다가 미성년자인 걸 알게 된 그들은 김이 팍 샌 얼굴로 서류를 탁 접더니 그냥 집에 가라 그랬다. 사이비였다니! 계단을 내려오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호구 잡히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무언가 화도 나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린애라 그냥 보내준 것도 웃겼다. 어른과 아이의 구분은 누가 하는 걸까? 나이 먹고도 나잇값 못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생긴 걸로만 보면 나는 거의 이십 대 중반 같아 보인다고 했다. 몇 개월만 지나면 곧 스무 살이 된다. 그러면 바로 어른인가? 어른이 되면 뭐가 달라질까.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지금의 나와 달라질까?

     뭔가 허탈해서 수능은 안 갔다. 그 시간에 집에서 퍼질러 자는 게 더 이로울 것 같아서. 몇시간씩 시험장에 갇혀서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문제를 꾸역꾸역 억지로 푸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채린이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래도 신청했는데 보러 가지, 그냥 찍기라도 하지, 대체 왜 그랬냐면서 등짝을 때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나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유롭지만 쓸쓸했다. 텅 빈 방에 천장만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있으니 무(無)의 상태로 돌아간 것 같았다. 흔한 텔레비전 하나 없는 집은 그날따라 기막히게 고요했다. 지나다니는 차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야. 김현우. 받아.”

     어깨를 툭 치고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현우의 패딩 주머니 속으로 담배를 빠르게 꽂아 넣었다. 수능날 이상한 용기가 생겨서 사복 차림으로 편의점에 가서 구한 것이었다. 웃기지 않을수도 있지만, 채린이네 편의점 말고 군고구마 팔던 옆 경쟁 편의점으로 가서 샀다. 아무튼간에 양심에 찔리긴 했다는 소리다. 손에 쏙 들어오는 네모난 곽을 쥔 현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손님들이 그거 제일 많이 사가길래.”
     “오~~~ 대박인데. 라이터는?”
     “......아.”
     “그럴 줄 알고 가지고 왔지롱.”
     “와, 준비성 뭐야?”
     “오늘만을 기다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터를 꺼내 들고 의기양양하게 웃는 현우. 내가 담배를 구해다 줄 걸 이미 알았다는 것인가. 얘도 그렇고 채린이도 그렇고, 주변에 있으면 내가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조연이 된 것 같을 때가 종종 있다. 행성 중에는 지구보다 중력이 센 행성이 있다고 한다. 과학 시간에 졸다가 얼핏 들었다. 얘네들은 중력이 센 행성이고 나는 그 주변을 떠도는 위성. 아니면 반짝하고 사라지는 혜성일지도. 혜성 맞나? 음… 잠깐 또 시답잖은 공상에 젖어 있을 때 현우가 몇 번 실패하더니 서툰 손길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자, 헛숨을 들이켰다. 야, 일로 좀 들어와. 골목에 드리운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담배 연기가 위로 길게 피어오른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워졌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멋있게 빨아들였다가 켁켁거리며 기침하고 마는 현우를 보며 어이없어 웃었다. 다 피지도 못할 담배를 뺏어들고 타들어가는 불씨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졸업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생각났다. 채린이와의 화해. 거부당할까 봐 무섭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을까 두렵지만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지기 전에 돌아가 보려고 한다. 채린이에게 꼭 먼저 가서 눈을 보고 말할 거다.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채린이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