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은 코끝이 모니터에 닿을 듯 바짝 붙어 화면을 응시했다. 가까이
본다고 오류가 보이는 것도 아닌데 불안한 마음이 몸을 움직였다. 몇 해
전, 같은 팀 후임이 잘못 적은 철자 하나로 수억 원의 손해를 입었다.
알파벳 한 글자라고 여길 수 있지만 무역에서 관련 서류 중 어느 하나 그
한 글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화물은 바다에 묶인다. 바이어와 분쟁까지 갈
뻔했으니, 손해로 끝난 것이 실로 다행이었으나 지운의 일생에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충격이 컸다. 지운은 원래 집요하고 강박적인 편이었다. 그래서 업무가
적성에 잘 맞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일 이후 그 성격이 한층 강화되어 한
건의 서류도 몇 번의 검토를 하지 않으면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지운, 오늘 저녁에 뭐 해?”
지운의 동기였다. 지운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며 늘 속 편한 소리만
하는 사람이었다. 별일 없다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약속을 잡았다.
지운은 별일은 없었지만, 집에가서 밀린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청소를 하고, 오랜만에 맥주도 마실 참이었다. 그런 건 내일 하라며
밀어붙이는 기세에 내일은 내일 할 일이 또 있는데 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퇴근 시간, 동기가 지운의 부서 앞에 마중 나왔다.
그는 지운을 향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운이 아는 선에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간을 체크리스트로 평가한다면 모든 항목이
만점일 그런 사람이었다. 반면, 지운은 절반의 항목이 0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 항목들은 대부분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여친이 가고싶다고 어렵게 구했는데. 야근한다잖아.”
동기는 북콘서트에 간다고 했다. 베스트셀러 여행 작가의 신작이란다.
그러면서 지운에게 너도 곧 휴가이니 참고 되고 좋지 않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람들은 여행을 쉽게 가지만 지운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항공, 숙박, 교통, 여행지, 식당 등 알아봐야 할 게 산더미였고 각각의
항목별로 가격을 비교해야 했고, 일정이 틀어질 것에 대비해 2안을
만들어야 했다. 여권과 예약 정보는 여러 개의 복사본을 준비하여 가방별로
분산해야 했으며 환전도 해야 하고 적당한 여행용 현금카드도
알아봐야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일정표도 만들어야 했다. 얼마나
효율적인 여행을 하기에 베스트셀러까지 되었는지 지운은 궁금증이
생겼다.
“반갑습니다. 한그린입니다.”
간단하게 소개를 마친 여자는 굵은 웨이브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에
잔꽃 무늬가 촘촘히 박힌 원피스를 입었다. 「오후 3시, 미지근한 하늘
아래」. 책 제목이었다. 지운이 아는 여행책이라고는 저스트 고 도쿄라던가
프렌즈 파리 따위였는데 대뜸 한 구절의 시 같은 제목이라니. 지운은
동기를 흘끗 쳐다봤다. 동기는 재밌을 것 같지? 소곤댔다. 책은 여행지의
역사나 정보는 없었다. 사진과 함께 작가가 그곳에서 느낀 감정, 향기,
온도와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지운은 정보를 얻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해 재미가 없었고, 자신과 너무 다른 작가의 생각은 나름
재미있었다. 지운의 일생에 한 번도 만날 일 없을 사람이었다.
*
지운은 동네의 작은 카페를 찾았다. 단종됐다던 원두를 취급하는 곳
이었다. 포털사이트를 뒤져 겨우 찾았는데 문 앞에 오늘 휴업이라는 문구가
적힌 A4용지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잠시 잊은채 지내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우연히 다시 찾게 되었다. 역시 기록해놓은 보람이 있는 커피였다.
그리고 단골이 되었다. 지운은 카페의 가장 구석진 자리를 찾았다. 주황색
백열등이 탁자의 정가운데를 비추는 약간 어둑한 자리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카운터에 다가간 순간 지운은 멈칫했다. 굵은 히피펌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그린이었다.
“아이스 카페모카요. 아! 휘핑 가득 올려주세요.”
그린은 주문하고 뒤를 돌았다. 바짝 서 있는 형체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친 지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눈알을
굴렸다.
“북콘서트 오셨죠? 아닌가?”
물기를 가득 머금은 그린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그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지운에게 고정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운은 어떻게 대응 해야할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으음? 이상하다. 맞는데. 완전 정장 입고 엄청 뚱하게 쳐다보던 사람.”
지운은 그린의 눈빛을 피해 시선을 옮겼다. 아마도 카페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드는 곳이 그린의 자리인 듯했다. 탁자 위에 그녀의 책과 손뜨개
토트백이 놓여 있었다. 지운은 그녀를 지나쳐 카운터로 향했다. 늘 그랬듯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자리로 돌아가 앉으려는데 그린이 맞은편에
가방을 놓으며 앉아도 되냐 물었다. 이 여자 뭐지? 지운은 뭔가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냥 그린의
장단에 맞추는 게 빨리 헤어지는 길일 듯했다. 지운이 정확한 정보에
집요하듯 그린은 호기심에 그러했다.
“저 그날 엄청 궁금했거든요? 웬 정장 입은 남자 둘이 와서. 아, 제 책은
주로 젊은 여성분들이 많이 보거든요. 아무래도 눈에 띄잖아요. 그런데
그쪽은… 제 이름은 아시죠? 아니, 기억 못하려나? 저는 한그린이예요.
이름이 뭐예요?”
자리에 앉자마자 그린이 말을 쏟아냈다. 커피 위에 가득 올라간 휘핑크림을
스푼으로 한 움큼 푸더니 작은 입속으로 쑥 넣었다. 이야기하랴 먹고
마시느랴 그린의 입이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연지운입니다.”
“와. 어릴 때 지우개라고 놀림 많이 받았겠다. 저는 내가 그린 그림은…
그거 있잖아요. 그걸로 엄청 놀림 받았거든요.”
“그런 적 없는데요. 그리고 지우개는 보통 지우라는 이름의 별명
아닌가요?”
“음. 그런가요? 아니, 아무튼 지운 씨가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거에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었다 해도 주최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는데. 지운은
아차 싶어 사과했다. 그린은 사과받으려 한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재미없었냐 묻는 그녀의 얼굴이 장난스러우면서도
생기있게 빛났다. 북콘서트에는 어떻게 왔냐. 원래 자신을 알았냐. 그린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한참을 떠들었다. 간간이 지운이 말할 때면 고개를
젖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린이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책 앞장을 펼쳐 사인을 하고 지운에게 건넸다. 지운은 그린이
떠난자리를 멍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머릿속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불현듯 마음속 체크리스트가 떠올랐다.
그녀의 행동과 말 어느 것도 지운의 기준표에 맞는 것이 없었다. 이상한
여자.
지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공
치는 날인 듯싶었다.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운은 여느 때와
같이 펜과 함께 자신의 책을 들었다. 통계의 미학. 플래그가 여기저기 붙어
있고 군데군데 메모가 적혀있었다. 책장을 넘겼지만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황빛 조명 아래 그린의 책이 놓여있었다. 지운은 책을
바꿔들었다. 가장 앞장.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열한 개의 숫자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오후 3시, 미지근한 조명 아래네요.
지운은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4시인데. 그리고 펜을 내렸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책을 읽어 나갔다. 조명이 미지근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