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영수 로고

바라만
보지 말고,
먹어요

    『달과 육펜스』만 읽고 서머싯 몸을 덮지 마세요. 1장만 읽고도 『케이크와 맥주』가 걸작임을 단언할 수 있었다. 이 독후감을 읽는 사람이라면 필시 자기를 구속하는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나 세상의 부스러기라도 핥아보려는 사람일 테니, 이 책 일단 사시라. 재미없다면 내가 사겠다. 대신 페이지 사이에 각질만 없길. 세상에 도서관이 단 하나만 남는다면 책장이 터져 나가더라도 이 책을 꽂고 말겠다.

     『케이크와 맥주』 속 배경인 빅토리아기 후반부 당시 영국은 뿌리 깊은 계급 사회였다. 귀족, 성직자만이 신사로 대접받았고, 부유한 자본가라도 계급이 낮으면 멸시받았다. 주인공인 '나', 윌리 어셴든은 성직자 집안의 조카로 의학을 공부하다가 문인이 되었다. 이는 어린 시절 우연히 어울리게 된 작가 에드워드 드리필드와 그의 부인 로지 드리필드의 영향일 것이다. 의학도가 인간을 육체의 한계로 규정하는 사람이라면, 소설가는 인간을 오래도록 관찰하고 쉽게 단언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계급으로 타인을 재단하던 '나'는 두 사람과 교류하며 점차 인간의 복잡한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어느덧 중견 작가로 불리는 '나'는 오랜 지인이자 유명 작가인 엘로이 키어의 연락을 받는다. 1장과 2장에서 로이를 묘사하는 대목은 서머싯 몸의 작가적 역량을 명쾌하게 증명하는 부분이다. 그의 모델로 여겨지는 서머싯 몸의 친구 휴 월폴이 이 책을 읽고 잠을 설쳤다는 말이 단번에 이해될 정도로, 로이를 그린 묘사는 날카롭고 시니컬하다. 엘로이 키어는 독자로 하여금 좋은 작가란 무엇인가 되묻게 만드는 인물이다.

     엘로이 키어는 명작을 쓴 사람이 좋은 작가라고 말하지만, 자기 작품이 명작으로 불리도록 여론을 조성하는데 능한 사람이다. 문학계에 진입하기 위해 평판을 다져놓고 또 자신을 거절할 수 없는 인물로 설계하는 과정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치밀하다. 그러나 '나'는 로이를 천박한 욕망에 따라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로는 보지 않는다. 그는 그 모든 과정에 진심이다. 로이처럼 유명세를 설계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로이는 에드워드 드리필드라는 대문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나'에게 전기 집필을 요청한다. '나'는 집필을 단호히 거절하지만, 그 대화는 두 사람과의 추억을 하나둘 떠올리게 한다. 명예와 권위에 집착하는 로이에게 에드워드의 첫 번째 부인 로지는 천박한 여성이다. 하지만 '나'에게 로지는 사랑스럽고 천진한, 은빛 햇살이 흘러넘치는 인물이다. '나'는 에드워드와 로지를 만나고부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세계의 균열을 목격한다. 혹은 자신이 균열의 원인이 될 때도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세상의 덧없는 욕망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관조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에드워드에 대해 함부로 정의 내리는 대신, 그의 고독을 그대로 기억하기로 다짐한다.

     작가는 성공하기 전까지는 가난에 시달리지만, 성공하고 나면 유명세에 쫓기는 괴로운 신세라고, 그러나 그러한 괴로움마저도 써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나'는 말한다. 자유인은 괴로움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니다. 자유인은 괴로움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모든 과정을 관찰하거나 그 한가운데에 휘말리면서 소설 말미로 갈수록 자유인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로지 드리필드 역시 다른 의미에서 진정한 자유인이다.

     로지는 명성과 욕망의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을 비웃으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햇살 같은 애정을 나눈다. 에드워드가 둘의 상실을 소설로 쓴 것을 두고 로지는 작가들이란 별난 존재라고 말할 뿐, 전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로지는 상실의 구멍에서 태어난 괴로움을 바닥나지 않는 애정으로 승화시키며 살아왔다. '사랑을 사랑'한 로지를 두고 세간에서는 잔인한 표현을 서슴지 않았지만, '나'는 로지의 '건강하고 천진한 본능'을 사랑했다. '나'는 로지와 에드워드를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둔다. 이 의도적인 불가해는 포기의 결과가 아니다. 납작하고 일방적인 이해 대신, 불가해한 것을 불가해한 채로 받아들이는 포용의 결과이다. 한두 마디 표현으로 로지와 에드워드를 매도해 버리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둘의 성질을 그 자체로 간직한다.

     '케이크와 맥주'는 '단순한 물질적 쾌락, 혹은 삶의 유희'를 뜻하는 관용구다. 로지가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눈앞의 케이크와 맥주를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 즐거움과 닮았다. 케이크와 맥주는 바라보기만 했다간 썩어 없어지고 만다. 덧없이 달콤하고 시원한 찰나의 기쁨이여. 어차피 맵고 짜고 시고 쓴 삶이라면, 당장 그 케이크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