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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루지 좀비
백신 접종 기간

    교훈은 시시하고 지겨운 소리가 아니다. 시시하고 징그러운 사람들을 위한 동앗줄이다. 찰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전하려는 교훈은 이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인스타그램에 누가 더 비싼 소비를 했는지 전시하는 날이 아니라, 일 년 중 단 하루라도 남을 용서하고, 사과를 구하고, 서로를 축복하는 날이라는 것. 다 알면서 매년 모르는 척하는 바로 그 이야기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크리스마스 캐럴」과 「유령에 홀린 남자와 유령의 거래」 두 단편을 엮은 책이다. 그중 스크루지라는 캐릭터를 널리 알린 「크리스마스 캐럴」은 1864년 발표된 당시, 의미가 퇴색되어 가던 크리스마스를 단번에 국가적 명절로 되살린 명단편이다. 초록색 전나무 잎과 선물상자를 감싼 붉은 리본, 시리게 흰 눈송이의 구조와 이글거리는 벽난로에서 풍기는 금빛 불티, 그리고 쉽게 주목 받고 싶은 음악가들이 매년 재해석하는 조화롭고 풍부한 캐럴의 화음은 전부 이 소설 이후 생겨난 크리스마스의 감각적 부산물이다. 찰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를 발명한 사람'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기독교인의 명절이던 크리스마스는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명절 중 하나이다. 서양의 영화나 음악을 타고 손쉽게 국경을 넘어온 이 날은 한국 사회에 특정 이미지와 음절을 각인시키며 뿌리내렸다. 하지만 그 반짝이는 장식 너머, 북태평양 혹은 인도양을 건너 한국에 도래하기 전 크리스마스의 원형이 무엇이었는지 물으면 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얼마나 비싼 걸 먹고, 얼마나 비싼 곳에서 놀아야 할 지 고민된다면 ChatGPT에게 묻지 말고, 찰스 디킨스를 읽어라. 고민이 한결 줄어들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럴」과 「유령에 홀린 남자와 유령의 거래」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그래서 명쾌하고 비극적이다. 주인공 스크루지 영감과 레드로 교수는 둘다 삶의 중요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인물이다. 남을 동정할 줄 모르고 돈만 밝히는 어리석은 스크루지. 슬픔과 고뇌, 잘못을 망각함으로써 자유로워지려는 어리석은 레드로. 베풀 줄 모르거나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피하는 자는 크리스마스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 지금껏 크리스마스 정신도 모른체 유급 휴일만 홀랑 받아 신나했네. 큰 고민 없이도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찰스 디킨스의 바람대로 이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정신을 되살리는 캠페인으로써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혔다. 아직까지도 크리스마스만 되면 이름을 숨긴 천사들이 곳곳에 기부금을 선물하는 것 역시 디킨스의 이야기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불멸성을 얻은 것처럼 스크루지 역시 불멸의 인간 군상이 되었다. 아니, 죽지 못해 사는 불멸의 좀비가 되었다. 그의 목소리에 서린 냉기는 백육십 년 전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소설 속에서 교훈을 얻고 참회했던 스크루지는 현실에서 구더기 가득한 좀비가 되어 이기주의와 약육강식이라는 이념을 바이러스처럼 퍼트리고 있다. 스크루지 좀비가 어디있냐고? 인터넷 기사 댓글, 유튜브 영상, 악플 전용 비공개 계정을 보라. 스크루지의 목소리는 그곳에서 서로 공명하며 치밀하게 사회 전체에 좀비 바이러스를 퍼트린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사람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이 서로 저주하며 싸우고, 하루 벌어 십 년을 먹고 사는 사람 앞에서는 납작 조아린다. 게다가 찰스 디킨스를 우연히 읽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그 스크루지인줄은 모르거나, 혹은 스크루지의 말에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건 명성에 비해 스크루지가 대단한 악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스크루지는 공연히 남을 때리거나 모욕하는 사람도 아니고 물려받은 재산으로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사는 부르주아도 아니다. 스크루지가 현대에서 좀비로 부활해 그 목소리를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별볼일 없는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스크루지는 그저 자기가 일해 번 돈을 칭송하고, 돈 아닌 것에 관심이 없는, 그래서 남의 삶이 어떻게 굴러가든 말든 내게 피해만 끼치 말라고 손을 내젓는 사람일 뿐이다(심지어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쓸 줄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유령이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낸 것은 스크루지가 그만한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스크루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즐긴답시고 쓰는 돈을 보면 스크루지야말로 우리에게 저주를 내릴지도 모르지만.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는 스크루지 좀비 바이러스를 막는 백신이 된다. 매년 이맘때,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전 접종하면 좋다. 일 년 중 단 하루인 크리스마스를 소비와 과시, 과욕이 폭발하는 날로 보내는 대신, 남을 용서하고, 사과를 구하고, 서로를 축복하며 보내라는 것. 크리스마스 계획을 짜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면 이 명쾌한 교훈을 따르면 된다. 크리스마스에 좋은 데에 가서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하지 못했다고 싸우거나 서운해 할 필요도 없다.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라. 메리 크리스마스!

p.22-23

"나 자신이 크리스마스라고 떠들썩하게 즐기지 않을뿐더러 게으름뱅이들이 즐기도록 해 줄 여유도 없단 말이지. 나는 내가 아까 언급한 시설들(감옥, 구빈원)을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있고 거기에만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요. 그러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곳에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 데 못 들어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사람도 많고요."
"차라리 죽겠다고 한다면 스스로 그렇게 해서 잉여 인구라도 좀 줄이는 편이 나을 텐데요. 게다가 미안하지만 난 그런 일은 잘 모릅니다." 스크루지가 말했다.
"아니, 아실 것 같은데요." 신사가 의견을 말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닙니다." 스크루지가 대꾸했다. "사람은 자기가 뭘 하는지 잘 알고, 딴 사람들 일에는 참견하지 않으면 그걸로 족한 법이거든. 내 일만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어서 가시지, 신사 양반들!"
계속 입씨름을 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 뻔했기에 신사들은 물러갔다. 스크루지는 자신이 더 나은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으쓱하며 평소보다 활기찬 기분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p.65

"세상 사람들이 가난만큼 매정하게 대하는 것은 없어. 그러면서도 부를 추구하는 것만큼 그렇게 가혹하게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대놓고 떠들어 대는 일도 없으니!"

p.148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고 비웃기도 했지만 그는 그들이 비웃도록 내버려둔 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지구상에서 무엇인가 선한 일이 생기면 처음에는 누군가가 그 일을 실컷 비웃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는 현명하게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럴」
p.296

"저는 배운 게 없고 교수님은 많아요." 밀리가 말했다. "저는 생각과 거리가 먼 일을 하고 교수님은 항상 생각을 하고 계시죠. 제가 보기에 우리가 당한 잘못된 일을 기억하는 게 우리 자신을 위해 좋은 일인 것 같은 까닭이 무엇인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그 일을 용서할 수 있으니까요."
"하느님, 당신께서 내리신 고귀한 본성을 저버린 저를 용서하소서!" 눈을 들어 위를 보며 레드로가 말했다.
"그리고 만약에요." 밀리가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바라고 기도하는 대로 언젠가 교수님의 기억이 되살아난다면 잘못과 그 잘못에 대한 용서가 한꺼번에 기억나는 게 교수님께 축복 아닐까요?"

p.303

그런 다음 크리스마스는 일 년 중 어느 때보다도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치유 가능한 슬픔, 잘못, 고뇌에 대한 기억이 우리 자신이 경험한 일들 못지않게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때이기에, 레드로는 소년의 머리 위에 한 손을 얹고 그 옛날 예언자가 지닌 식견의 위엄으로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금한 자들을 꾸짖고 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신 그분께 증인이 되어 주시기를 말없이 청하며 그 소년을 보호하고 가르치고 교화하겠다고 맹세했다.

「유령에 홀린 남자와 유령의 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