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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올해의 모든 이야기는 작년 12월 3일부터 시작되고, 그 밤과 연결된다. 어쩔 수 없다. 당시 나는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관련 토론회에서 토론자로 발표할 원고를 쓰고 있었다. 네이버 뉴스 중독자인 남편이 함께 거실에 있었는데, “방금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데.”라고 말했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 너머로 그 말을 들은 나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계엄이 뭔지 모르지?“라며 면박을 줬다. 이상한 기사 좀 보지 말라는 잔소리를 하면서. 그 모든 말이 안되는 소리가 현실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이어진 뉴스 속보에서 계엄사령부 포고령을 들으며, ‘위험의 이주화’를 지적하는 이 토론문은 포고령을 위반하는 것인지, 그래서 나도 계엄법에 따라 처단될 수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잠시지만 진지하게 고민했다. 토론회를 연기한다는 연락을 곧이어 받았다.

     그리고 이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경험했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목격하고 있는 대로다. 내란 수괴와 그 일당들이 어떤 행동을 했고 그에 대해 여전히 무어라 주장하고 있는지 굳이 내 글에서 반복하지 않겠다. 글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그 밤 많은 이들이 국회 앞으로 모였고 국회 안과 밖에서 최악의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을 해냈다. 뉴스를 보고 딸이 당연히 여의도로 나갔을 거라 생각한 부모는 동생을 시켜 내 안부를 묻는 전화를 했는데, 난 안전하게 집에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들은 나의 정치적 성향을 안다. 아니 아주 정확히는 모를 텐데, 선거때 어떤 당을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지 정도는 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왔는지는 여기저기 밖에서 떠드는 얘기를 전해 들으며 대강 짐작은 할 거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무너지는지는 모른다.

     나는 공권력을 무서워한다. 폭력을 독점한 합법적 권력으로서, 독점한 폭력을 언제든 행사할 수 있는 그들이 심히 두렵다. 정치적으로 경계한다거나 견제한다는 입장보다는, 훨씬 더 피부에 닿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태도다. 이 말을 듣고 누군가는 의아해할 것 같다. 공권력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국가를 상대로, 경찰을 상대로 많이 싸워왔기 때문에. 공권력이 적법하게 행사되었는지 그 위법성을 다투고, 집회를 방해하고 집회 참가자들을 불법 체포하는 경찰을 고소하고,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하는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했다. 책상 앞에 앉아서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을 직접 몸으로 부딪쳐 만나기를 되도록 꺼린다.

     10년도 더 된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현장에서의 일이다. 송전탑 건설에 항의하는 주민들에 대한 경찰과 한전의 폭력이 심각하다는 말에 전국에서 연대하는 시민들이 모여들던 때였다. 그래봤자 한 줌의 사람들이었다. 주류 언론은 현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웠고 대부분이 노인으로 구성된 마을은 사실상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그곳에서 나는 ‘인권침해감시단’이라고 적힌 노란색 민변 조끼를 입고도, “변호사입니다. 폭력을 행사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하고도 경찰들에 의해 흙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몸과 발소리와 고함과 비명에 놀라 순간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바닥에 쓰러진 채 머리카락 구석구석까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글로 표현하면 그다지 큰일이 아닌 것 같은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지를 붙들려 허공에 던져지는 경험은 내 안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체벌이 훈육이 되던 야만의 시절을 살았기에 잘못을 했든 하지 않았든 다양한 이유와 명분으로 다양한 부위를 맞고 자랐다. 그 지긋지긋한 사적 폭력이 가벼운 일이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제복 입은 이들에 의한 얼굴 없는 폭력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한 바가지 욕을 한 후 다시 주민들 곁으로 가서 경찰과 싸우던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계속 싸울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었다. 완벽하게 패배했다는 것을 알았다.

     경찰은 물론이고 무장한 군인이 평상복을 입은 민간인과 뉴스 화면에 함께 잡히는, 그것도 전 직장이었던 국회를 가득 채운 군인들이 유리창을 깨고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포 중 하나였다. 여의도로 뛰쳐나가기는커녕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여권을 꺼내들고 멀리 나를 받아줄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닌 법원에서 똑닮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극우 폭동의 모습이라니. 겨울이 가고 봄이 되도록 탄핵 집회가 이어지는 기간 동안 광장에 몇 번 나가지 않았다. 그것도 가장 시민들이 많이 몰리고 압도적으로 탄핵 여론이 형성되어서 경찰이 겁 없이 시민들에 대항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던 시기에 단 몇 번.

     이처럼 엄청나게 겁이 많은 내가, 법과 제도라는 링 안에서 보호장구와 글러브를 착용하고 규칙에 따라 싸울 수 있다고 하니까 그나마 이만큼 용기를 내서 공격하거나 방어하고 겨루며 살았다. 이 링이 얼마나 허약하고 허접한지, 애초에 링이나 규칙 따위는 무시하고 여차하면 탱크로 밀고 들어오는 이들이 동시대에 이만큼이나 존재하는지, 이 모든 것을 실감하고 나니 또다시 싸울 의욕이 사그라지는 시간이었다. 한동안 이민을 고민했다, 정말 진지하게. 대통령 탄핵과 체포, 구속과 재구속, 대선, 특검 수사 등 K-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논하며 급한 상황은 일단 끝난 것처럼 여겨지던 지난 일 년. 나는 끝날 줄 모르고 내내 불안했다. 그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두려움 앞에 무기력했다. 일어난 일은 또 일어날 수 있으니까.

     다행히 이것이 지난 한 해의 전부는 아니다. 쪼그라들어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나를 날마다 다시 일으키고 살게 하는 존재가 있었다. 작년 11월 우리 집에 와준 고양이 호리. 인간 외 다른 동물과 살아본 적도, 가까이 지내본 적도 없던 내가 어쩌다 이 털북숭이 친구를 만나 ‘세상에 이런 예쁨과 기쁨이 있구나’ 매일 감탄했다. 특히나 그 밤 이후 집 밖은 엉망이고 무서운 것투성인데, 호리로 인해 시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감정을 느끼는 기괴한 순간들을 겪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면 너무 고통스러운데, 번호키를 누르고 집 문을 열면 이미 코앞까지 마중 나와 있던 호리의 작은 머리가 빼꼼 보이는 그 순간부터 행복했다. 불행한 시대에 충분히 행복한 사사로운 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니, 낯설었다. 그렇게 호리가 주는 기쁨에 기대, 호리를 위한 노동으로 분주하게, 그 밤의 지속을 견디고 있다.

     두려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과연 그 밤에 대한 정치적, 법적 심판이 제대로 이뤄질지도 솔직히 자신이 없다. 또 무슨 꼴을 봐야 하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느끼든 혹은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삶은 꼬박꼬박 이어진다. 불행해도 행복할 수 있었고, 두려워도 기쁠 수 있었다. 여지없이 다가오는 2026년이 버겁더라도, 괜찮을 거다. 빨리 자러 가자며 내 옆에 앉아 자기 엉덩이를 갖다 대고 있는 이 뜨끈한 존재에게 내년도 잘 부탁한다고 말해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