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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백권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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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도서
『케이크와 맥주』, 서머싯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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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강미리
두 주인공, 드리필드와 어셴든의 발자취에서는
별달리 신기한 게 없었다. 도덕성이 결여된 초미녀 로지에게 스스로를
바치고 누더기가 되어보는 굵직한 경험담이 특히 그랬다. 이제는 자연의
섭리처럼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는 사랑의 한 형태다. 사실 나의 것은
사랑과 구별되는 성욕과 집착과 착취의 혼합이라고 일컫지만, 남의 것은
폄하하지 않겠다.
어셴든의 입가와
머리에서는 비판이 떠나질 않는다. 정확히 무엇을 쓰레기 취급하는 건지
모를 때에도 맹목적으로 통쾌해하는 나를 보며 경계심을 느꼈다. 수려한
비판이 이렇듯 열등감에 악용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비판은 평생의 외로움을 치유했다. 웬만한 인류에서 나만 아름다운 ‘어떤
풍광이나 그림을 몇 시간씩 바라볼 수’ 없어서 무능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어셴든은 ‘아름다움은 황홀감이고 배고픔만큼이나 단순’하다고
아름다움의 효험에 대고 한계를 지었다. ‘장미 향기와 같아서 한번 냄새를
맡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사실상 요리사와 조향사도 물먹인 거다.
대담하게 유부녀 여자친구를 사귀는 걸 계기로 어셴든이 관찰자 겸
비평가에서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처세와 각종 남 일에는 심드렁하지만
폴리아모리 여자친구를 독점하는 것에 처음으로 정열을 보여주었다. 멀쩡한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하긴 로지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전파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 제목이 ‘쑥과 물’이
아니라 ‘케이크와 맥주’겠지. 조지 켐프를 완벽한 신사라고 일컬을 만큼
로지는 많은 걸 바라지 않는 여자다. 아름다움이 이따금씩 세상 여기저기를
비틀어버리는 일례를 보여준다고 나는 이 고전을 치하하고 있다. 왜
그것밖에 못 바라보는 건지, 아마 짝사랑한 어셴든을 로지가 차지한 것에
대한 하소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