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영수 로고

장수하는 사람이
이긴다

     이 책의 제목이 <케이크와 맥주>여서 영화 <커피와 담배>처럼 케이크와 맥주 먹으면서 chill하게 떠드는 종류의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이 책에서 케이크와 맥주를 먹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chill 대신 날을 바짝 세우고 명성과 신화, 혹은 평판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초반에 화자는 앨로이 키어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히 비꼰다. 작가로서의 실력보다 대인관계와 처세술로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나에게도 로이 같은 누군가가 있다. 예전에 친구들과 그 사람 이야기를 하다가, 영화계에서 성공이란 게 얼마나 허무한지, 입봉이란 게 얼마나 덧없는 일인지 떠들어댄 적이 있다. 잘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사업 감각도 있어야 하고, 사회 생활도 잘해야 한다고. 나는 그보다 영화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투자해달라고 조를 인맥도 없고 사회성도 젬병인 나 같은 사람은 결국 영화로 돈 못 벌지도 모른다며 신세한탄을 했다.

     저런 인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있어왔구나. 잘근잘근 씹어줘서 통쾌하면서도 씁쓸했다. 사실 지금은 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위대한 예술가가 되지 못할 나 같은 범재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로이처럼 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사실 로이를 판단하는 화자는 과연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자기 얘기는 안 하잖아.

     화자 어셸든은 위트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냉소적이지만 로지에게만은 유독 따뜻하다. 끔찍한 작가의 아내, 저속한 여자라며 모두가 욕하지만, 그는 로지를 좋아했고ㅡ 사랑이 많고, 진실하며, 예의 바르고, 순박한 여자였다고 회고한다. 로지 뿐만 아니라 드리필드의 전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여러 대화들을 통해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가를 이렇게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 만들어질 드리필드의 전기 속에서 로지는 전기를 쓰는 두 번째 부인 에이미와 로이의 입맛에 맞게 편집되어, 존재한 적 없던 유령처럼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더 오래, 나중까지 산 사람들의 선택에 좌우 되는 것이다.

     나는 바보가 되기 싫고,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강박 때문에 남들 앞에서 대체로 좋은 사람인 척, 모두를 이해하는 척 해왔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부담이 조금 덜어졌다. 어차피 내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자기 그릇이 큰 척하는 재미없고 착한 사람보다 자기 주제를 알고 재밌고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리고 오래 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