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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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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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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서이정
그날은 수도가 얼어서 수리기사님을 불러야 했다. 물을 틀어놓았는데도
일을 다녀온 사이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전선을 연결하기 위해서 집 문을
훤히 열어두어 냉기가 들어온다. 집이 사정없이 추워졌다. 밖에 있는 거나
다름없는 기분이 들었다.
기사님은
배관 덮개를 여는데 애를 먹는 듯했다. 덮개도 얼어붙어버린 건지 몇 번
내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윤제는
화장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환풍기를 틀면 처음에는 탈탈거리는 소리가
난다. 덮어놓은 변기 뚜껑에 앉아서 담배를 하나 물었다. 두 개비밖에 남지
않았다. 환풍기는 변기 바로 위에 있기 때문에 냄새를 그나마 뺄 수 있다.
사실 집에 쥐소리가 난 지 며칠이 되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그런 이유로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걸 기억했다. 어차피 집 문도 못 닫으니 춥고
연기 때문에 도망갈 거라 생각했다. 이때가 아니면 또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짓은 냄새가 밸까 두려워 하지도 못할 것이다.
꼭 방황을 하는 것 같고 일탈을 하는 기분이 든 윤제는 한참을 멍하니
자신에게 닥친 불운의 기분을 곱씹었다. 마침 담뱃재는 어디다가 버려야
했는지는 생각도 안 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도가
얼어 내리지도 못한 변기 물에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담뱃재가 흩날린다.
기분은 나빴다. 담배 냄새는 환풍기로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아 찍찍대는
소리는 들리고, 몸에는 냄새가 배는 것 같고, 몹시 추웠다.
타고 있는 담배를 보다가 캡슐 부분이 붉어진 것을 보고 전구에 가까이
대보니 정말 붉은 게 맞았다. 담배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윤제는 입안을
훑다가 입술을 한번 빨았다. 거울 속 윤제는 입술이 터져 있었다. 추워서
터진 건데 이상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피를 닦았다. 손에 묻은 피는 또 닦아내야 하는데 끔찍하게 씻기 싫었다.
일을 하느라 손을 자주 닦아서 손거스러미와 살갗이 모두 벗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면서 손을 계속 긁는 건지 일어나면 손톱 밑이 검게 변해
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인지 마침 물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란 것이
생각났다. 그러니 담배 냄새 투성이인 채로 아무것도 안 하고 화장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기사님이 마침
수리를 마쳤다며 물을 틀어보라고 소리쳤다.
물은 다행히 잘 나왔다. 온수가 나오느냐고 묻는 소리가 또 들린다. 윤제의
집은 온수가 나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집이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이
나오면 그냥 나온다고 말할 참이었다. 꽝꽝 얼어버린 손이 저릿하게 신호를
보내면 물 온도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윤제는 수리기사님 목소리만큼 크게
목소리를 냈으면 하면서 나와요- 그렇게 소리쳤다.
수리기사님은 20만 원을 부르셨고, 윤제는 군말 없이 이체했다.
이제 윤제의 생활 통장에는 4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 새해가 9일 남은
시점이었다. 하루에 5천 원 안쪽으로 쓰면 되겠지, 그런데 가스비 이체를
하지 않은 게 생각났다. 생각이 이렇게 발 빠르지 못한 것도 불운일까?
가스비를 내면 마이너스가 나기 때문에 차라리 연체되기로 한다.
윤제야, 가난은 따라오는 것이다. 나 따라오는 자식 뒤로 가난이란 녀석이
또 따라와. 도망을 갈 수가 없더구나. 근데 나 떠나면 이제 네 엄마 뒤에
붙어버릴 그 가난이란 녀석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윤제의
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후련한 기색이었다. 장례비가 뭐고
들긴 했지만 어머니 입장에서는 돈 나갈 데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
표정을 읽은 윤제는 속 어딘가가 메슥거렸다. 자신도 똑같은 기분을 느낄까
봐, 그리고 어머니도 그랬으니 자신이 이러는 건 당연하다며 합리화할까
봐, 그리고 그 순간을 자식에게 들킬까 봐.
하지만 윤제는 그래서 결혼도 자식도 포기하기로 했다. 여러모로 들키고
싶지도 않았고, 책임을 지고 싶지도 않았고, 무거워지는 것이나, 쫓기는
것이나 다 싫었다. 그 어느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뻔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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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희는 최근 꿈에 빠졌다.
전공에서 늘 낙점이라 이름난 공대인데도 취직을 못하던 다희는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퇴근길에 영화 포스터를 발견했다. 극단에서 활동하던
것으로 기억하던 배우가 이제는 상업 영화에 나오는 것이 신기해 한참을
바라보았다. 대학 시절 연극부로 활동했었던 다희는 그날 그 포스터의
영화를 관람했다. 집에 도착하니 1시였지만 두 볼은 피곤한 기색 없이
붉었다. 영상의 붉은 커튼과 푸른 복도, 노란색 조명이 쏘이는 방 안
배우들의 얼굴.
다희는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다. 아르바이트를 해 모았던 돈으로 동영상용 카메라를
구입했다. 이것저것을 구입하니 한 달 월세치를 다 썼지만 마음은
두근거렸다. 다희의 두 눈은 프레임이었고, 온 세상은 담을 것 투성이었다.
그러나 요즘 가요도 사랑 노래만 나오는 것처럼, 사람은 정말 오직
사람에게만 관심 있다. 특히 사랑을 정말 좋아한다.
다희는 이제 누구를 사랑할지 고민한다. 유명한 영화감독도 뮤즈는 하나씩
두었던 걸 인상 깊게 여겼다. 그리고 연애할 때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얼굴과 표정을 잘 담을지 고민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희에게는
지금 연애 상대처럼 아끼고 관찰할 만한 뮤즈가 필요했다. 다희는 자신의
이상형 같은 걸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의는 바르면 좋겠고, 좋은 냄새가
나면 좋겠고... 생각해보니 그런 건 필름에 담기지 않을 텐데.
질문을 바꾸어, 다희는 자신의 카메라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은지
고민하기로 했다. 일단 사랑이어야지. 세상 사람들은 사랑 아니면 관심
없으니까. 그리고... 문득 유튜브에서 보았던 청년 실업자 100만 돌파라는
뉴스를 들은 적 있다. 생각해보니 다희도 지금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지 어딘가에 소속된 것도 아니었다. 소속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야겠다. 이 세상은 이제 소속되지 못한 사람이 주류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의 사랑은 어떨까? 분명 가난하겠지. 찌질할 것 같고.
몇 개의 가닥이 잡히자 줄줄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고, 다희는 이걸 담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자.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다희의
아름다운 나타샤 찾기 대작전이 시작된다.
다희는 낮 내내 굶고 새벽 1시부터 5시까지 배달을 두 번 시키기로 했다.
새벽에 배달하는 사람들은 낮에도 일하고 새벽에도 일할 것 같다는 추론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배달 기사분들은 마스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다희가 원하는 마스크를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려웠고,
나잇대마저 높아 생각했던 대상에서는 꽤나 벗어났다. 다희는 배달을
만나서 수령하는 것으로 바꾸었고, 일부러 내려갈 때 종이컵에 커피 반
잔을 담아가기로 한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찾은 지 5일째, 지금 다희는 수염이 거뭇하게 오른 40대 추정 배달
기사의 커피 마시는 옆모습을 훑고 있다. 그날은 육회비빔밥을 시킨
날이었고, 전화로 들은 배달 기사의 목소리는 30대였는데 얼굴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나이 먹은 나타샤.
찾긴 찾았는데 이제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었던 다희는 결국
그날은 다시 빈 종이컵을 덜렁 받아 들고 멀어지는 오토바이를
바라보았다.
육회비빔밥을 까지도
않고 다희는 생각에 잠긴다. 오토바이 얘기를 꺼낼까? 날이 춥다고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일단 전화번호는 전화를 받았으니 있고, 무슨 얘기를
하긴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다희는
다음 날 새벽에도 육회비빔밥을 시켰다.
이번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희는 다음 날의 다음 날 새벽에도
육회비빔밥을 시켰다. 이번엔 나타샤였다.
커피 반 잔을 들고 나가니 나타샤는 마스크를 내리고 웃고 있었다. 매번 안
이래주셔도 되는데-
- 기사님, 저는
영화를 찍는 학생인데,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어요. (학생도 거짓말이고
다큐멘터리도 거짓말이다)
- 네.
- 기사님께 인터뷰랑 촬영을 몇 번 부탁드리고 싶은데, 혹시... 안 될까요?
(인터뷰는커녕 다른 걸 찍고 싶은 마음만 있다)
- 아유, 저 그런 거 잘 못합니다.
- 저
촬영비 이런 거 넉넉하게 챙겨드릴 수 있어요! (적금 깰 마음을
먹어야겠다)
- 거, 어떤 거 찍는데
그래요?
다희는 눈을 반짝거리며
얘기를 한다. 제 다큐멘터리는요- 실제를 담기보다는 영화처럼 많이 담아낼
거예요, 말을 많이 하실 필요도 없고-
- 학생인 것 같은데, 얼마를 주려고 그래요?
- 촬영하는 날마다 10만 원씩 드릴게요, 한 달 안에 끝낼게요.
약속드릴게요.
- 학생 돈 뺏는 것 같아서,
맘이 좀 그러네.
- 근데 진짜 기사님
일상을 담아내고 싶어요. 멋지고 아름답게 담아드릴게요.
- ...
- 부탁드릴게요.
- 나 말고 다른 사람 소개시켜줄게요.
- 꼭
기사님이어야 될 것 같아요. 진짜 한 번만 도와주세요.
다희는 주머니에 꼬깃꼬깃 적어둔 자신의 번호를 나타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한다. 매번 새벽에 이렇게
음식도 가져다주시고 감사드려요, 제가 내일 다시 육회비빔밥 시킬 건데
그때 답해주세요-
- 학생.
- 네?
- 내일부터 찍어. 대신 일주일
안으로 부탁할게요.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토바이가 부르릉
지나간다.
-
윤제가 커피 맛이 남은 입안을
훑으며 사거리의 신호를 기다린다. 새벽 밤거리의 사거리는 사람도 없어서
무단으로 지나가는 승용차 몇 대를 보지만,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콜이
울린다. 바로 이렇게 연속으로 뜨기도 쉽지 않은데, 조금 더 빠듯하게
달려야 괜찮을 것 같다. 결국 신호등이 노란색일 때 다시 운전을 시작하고,
윤제는 불현듯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현재 요양병원에 있고,
다짐과 다르게 윤제는 자식도 있다.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어 여동생의
집에 맡겨두었지만. 아이의 엄마는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른다. 사실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종종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면 이제 생각을 멈춘다.
오빠, 애가 자랄수록 오빠 얼굴이 안 보여- 윤제야, 엄마 좀 보러 와주렴-
오빠, 나도 이제 힘들어, 언제까지- 윤제야, 내가 죽어야 네가 편할
텐데-
그래도 윤제는 이제 언 수도를
녹이기 위해 20만 원씩 내지 않는다. 벌써 12년 전이다. 알아서 스티로폼을
감싸고 헌 수건을 감싸서 수도관에 묻어두고, 묻어두고, 묻어두고, 이제는
묻어둘 수 있다.
그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들 해도.
-
다음 날 거짓말처럼 다희의 집의 수도가 얼었다.
- 기사님, 제가 집에 수도가 얼어서, 오늘은 커피를 못 드립니다.
- 수도가 얼었어요?
- 킁, 네.
윤제는 꼬질하게 앞머리가 내려진 다희를 내려다본다. 여러 겹으로 옷을
입어서인지 몸은 원래 몸보다 부풀어 있고, 입술이 잔뜩 갈라져 있었다.
- 수도 계량기가 어디에 있어요?
- 저...
잘 모르겠어요. 오늘 일어난 지가 얼마 안 돼서요.
코를 훌쩍이는 다희를 보며 윤제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 학생 오늘 뭐 찍으려고 했어요?
-
기사님이 일하시는 거... 그리고 육회비빔밥 드시는 거요.
어쩐지 오늘은 육회비빔밥이 두 개였다. 육회비빔밥 값이랑, 10만 원,
자신이 12년 전에 냈던 20만 원을 생각했다. 그때 그 20만 원은 확실히
바가지였지, 젊은 애한테. 다시 값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묻어두기로 한다.
젊은 학생한테 매정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배달 콜이 울렸다. 10만 원을
생각했다. 오늘 새벽 배달은 포기하기로 했다.
- 학생, 수도관이 보니까 이거거든? 안 쓰는 수건 같은 거 있으면 가지고
와봐.
윤제는 다희 집의 콘센트를
길게 이어서 헤어드라이기로 수도관을 열심히 데웠다. 비상으로 가지고
있던 연장으로 쿵쿵 내리치고 돌려 들어냈더니 꽝꽝 얼은 수도관이
그날처럼 묻혀 있었다.
- 기사님- 물
나와요!
- 학생! 따뜻하게 나오는지도
봐봐!
- 나와요!
- 미지근하게 말고! 열 펄펄 끓게 나오는지 보라고!
- ... 이제 나와요!
윤제는 수건으로
꽁꽁 수도관을 감싸고는 배관 뚜껑을 다시 덮어냈다. 손이 벌겋게 텄다.
다희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러더니 종이컵을 내민다.
- 기사님, 이제 커피 다시 드릴 수 있어요. 감사해요 정말.
윤제는 그런 다희를 보며 웃는 듯했다. 확실히 커피는 따끈했다.
- 기사님, 제가 다큐멘터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이 육회비빔밥을
꼭 기사님 집에서 먹는 걸로 촬영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 안 될 것 같은데.
- 이 카메라로 담을
거고요, 집도 조금 촬영하려고 해요. 집은 깔끔하지 않은 상태여도 충분히
괜찮고요, 진짜 있는 그대로를 담을 거예요.
- 아가씨는 세상이 안 무서워?
아직은요.
- 세상은 진짜 무서운 데야.
함부로 새벽에 모르는 사람 집에 가는 건 위험하고, 그리고 그런 부탁도
아주 무례한 거야. 나는 아가씨가 뭘 하는지 솔직히 잘 몰라.
- 그런데 저는 아저씨한테 돈을 드릴 수 있어요.
- ...
- 영화가 다 완성되면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그래서 윤제와 다희는
오토바이를 타고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다.
다희는 오토바이를 처음 타봐서 신기했고, 자신이 속으로 나이 먹은
나타샤라고 부르는 아저씨의 등을 안고 있자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윤제는 피곤해서 아무 생각이 없다. 다만 커피를 먹어서 눈은 조금 벌겋고,
자신이 평소답지 않다고 느낀 것 외에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이 오토바이는 흰 당나귀인가? 다희가 몽롱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윤제의
오토바이는 흰색도 아니고 당나귀도 아니었다. 주황색 가로등이 점점이
박혀 있는 골목길이었다.
- 아가씨
먼저 내려요.
윤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페인트 칠이 벗겨진 철문으로 들어갔다. 다희는 그 모습을
찍었다. 곧장 나온 윤제는 담배를 물고 주황색 빛을 입가에 달았다. 다희는
그 담배가 꼭 가로등 같다고 생각했다. 골목길은 좁지도 넓지도 않았고.
눈송이들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녹았다. 카메라에 닿을까 봐 손으로 기계를
꽉 잡고 머리를 푹 숙였다. 연기가 입김 섞이게 하늘을 타고 올랐고,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그날에는 윤제의 집을, 널려진 빨래들을, 설거지를 하는 뒷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깜빡 잠에 들었다.
발치에는 처음 보는 옷이 떨어져 있었다.
- 아가씨, 집에 데려다줄게.
윤제의
머리카락 끝에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 아저씨 머리 말리는 거 찍어도 돼요?
-
그래요 그럼.
화장실 문이 자꾸
닫혀서 다희는 문틈 사이에 참치캔을 끼워넣고 촬영을 했다. 뿌연 증기가
나오는 틈으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배도 안 나온 아저씨.
아름다운 아저씨. 눈 내리는 날의 나타샤.
생각보다 머리는 금방 말랐고, 윤제는 헤어드라이기를 끄고 전선을 돌돌
말아 정리했다. 다희는 더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지만 바싹
마른 머리를 더 말려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윤제가
카메라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는 슬리퍼를 벗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 내가 잘 나와요?
- 네, 네.
- 도대체 뭘 찍는 건지 모르겠네.
다희는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게 귀가 뜨거워졌다. 화장실 문틈 너머의
주황색 가로등들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으나 어렴풋이 눈발이 가리는 듯
깜빡였다. 계속 계속 깜빡였다. 윤제가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다가왔다.
- 시동 걸어놓을 테니까,
5분 이따가 나와요.
다희는 부엌
앞에서 카메라를 이리저리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등이 켜졌다
꺼졌으며, 여전히 눈발이 내리는 창가를 보며 다희가 집에 혼자 남겨져 서
있었다. 이대로 오랫동안 있고 싶었다. 눈이 내리는 겨울에 나타샤의
집에서.
윤제는 시동을 걸고
담뱃불을 붙였다. 그러다 픽, 시동이 꺼졌다.
윤제는 찡그린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고 다시 엔진 페달을 밟았다. 담배
연기가 얼굴로 날아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몇 번을 힘주어 누르니 다시
시동이 걸렸다. 담뱃재가 눈처럼 날아갔다.
그리곤 픽, 다시 시동이 꺼졌다.
윤제는 담배를 손에 끼워 바닥에 한 번 털고는 골목을 멀리 바라봤다. 길이
얼고 있었다. 눈이 쌓인다. 눈이 소복하게도 밉게 쌓인다. 이런 날 운전을
하다가 넘어진 적이 있었다. 병원비가 더 나와서 이런 날에는 배달을 하지
않기로 맘먹었었다. 아가씨가 10만 원을 주면 오늘은 배달을 안 나가도
될지도 모른다.
다희가 철문을 열고
나왔다. 윤제는 카메라로 가려진 다희의 머리를 응시했다.
- 아가씨, 오토바이가 시동이 안 걸리네. 걸어가야 될 것 같아.
- 저 그러면 해 뜨면 가도 돼요?
- 그래요
그럼. 그때 다시 시동 걸리는지 보게.
다시 들어온 윤제와 다희는 잠시 적막한 집 안에서 서로를 보지 않고 서
있었다. 이윽고 다희가 혹시 머리만 감아도 되겠냐고 얘기를 하자, 윤제는
조금 찡그리다가 문은 꼭 잠그라고 말했다.
윤제는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지 않은 채로 한참을 골똘히 있는 듯
했다. 그때 마침 다희가 주머니에서 5만 원 두 장을 꺼내어 윤제의 손에
쥐어주었다.
- 아저씨,
고맙습니다.
그래서 윤제는 서랍장에
있는 수건을 꺼내주었다. 다희는 꾸물거리며 겉옷을 벗고 양말을 벗어서
냉장고 옆 구석에 잘 접어두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깜빡 잠에 들었다. 발치에는 아는 옷이 떨어져 있었다. 아까 다희
무릎에 덮어줬었던 겉옷이다.
-
아저씨, 피곤하세요?
윤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고 옷을 주워 의자에 다시 걸었다.
- 아저씨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
그렇게 늙지는 않았어.
- 저는 24예요.
- 졸업은 했어?
윤제는 12살 차이
나는 여자애의 머리끝을 살폈다. 제대로 말려진 것 같지도 않다. 졸업은
했다며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다희의 말이 제대로 잘 들리지는 않았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오랜만에 보일러를 24도로 틀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방바닥이 따뜻했다.
나지막히
숨소리를 내는 윤제의 옆모습을 다희는 한참 바라보았다. 머리가 불편하게
꺾여 벽에 기대어져 무너져내리듯 잠에 든 윤제를 다희는 한참 바라보았다.
졸렸다. 다희는 따뜻한 방바닥에 주저앉아 냉장고에 기대 눈을 감았다.
눈 내리는 날 보일러가 돌아가는 주황색 집에 잠이 문도 두드리지 않고
찾아왔다.
-
다음 날, 다희는 윤제의 화가 난
듯한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윤제는 방 안쪽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었는데도 실랑이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다희는 문 손잡이에
초점을 맞추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윤제는 요양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보험과 계약금을, 병원 측의 입원비
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태가 안 좋아진 어머니를 병원이
감당하기에는 더 많은 돈이 든다는 이야기였다. 이상한 상황도 아니다.
나빠질 일만 남은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사실이 윤제의 인생 전체를
꼭, 나빠질 일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것 같아 윤제는
절망스러웠다.
윤제는 전화를 끊은
이후에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곧 있으면 출근이었다. 비 오는 날보다
눈이 오는 날이 더 안 좋다. 윤제는 낮엔 인쇄소 보조를 하는데, 사장은
그럴 때마다 종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오토바이가
시동이 안 걸린다면 상황은 더 안 좋을 것이다.
다희는 윤제의 목소리가 잠잠해지고 곧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새어나오자
황급히 녹화를 중지하고 카메라를 숨겼다. 윤제는 그런 다희가 부스스
일어나는 척하는 순간을 보았다. 다희는 괜히 하품을 했다. 그리고 눈곱이
끼진 않았는지 빠르게 눈을 비볐다.
- 학생, 아침은 대충 먹자.
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제 차게 식은 육회비빔밥을 먹고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4시간 정도를 눈 붙인 것 같았다. 이번에도 윤제는 5분
이따가 나오란 말을 남기고 현관에서 나섰고, 이번에는 시동이 걸리는 건지
탈탈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희는 카메라 속 녹화된 자고 있는 윤제의
옆모습을 재생했다. 얼굴이 눌려서 웃겼다. 그래도 주황색 등에 반사된 그
옆모습은 자신이 영화를 찍고 싶단 생각이 들게 한 그 영화에서의 장면과
유사했다. 다희는 그 영상이 마음에 들어 한참을 보다가, 5분이 지난 것만
같아 급하게 문을 나섰다.
윤제와
다희는 창가에 나란히 앉아 우동을 먹는다. 윤제는 마시듯이 우동 면을
씹어넘긴다. 다희는 잠에서 덜 깬 채로 졸면서 면을 우물거린다. 윤제는
그런 다희를 힐끗 보고는 물을 따라준다. 다희는 물을 마시고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 학생, 촬영 더 할
거야?
- 네? 네.
- ...
- 그래도 될까요?
- 방해 안 되게 해야 해, 일하는 데는 못 들어와. 밖에서만 찍어.
우동을 절반 이상 남긴 다희는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결제는 윤제가 했다.
오토바이를 세워 놓은 골목으로 나란히 걸어가던 윤제와 다희는 문짝 키가
다희보다 겨우 조금 큰 인쇄소에 다다른다. 윤제는 인쇄소에 들어가 문을
닫았고, 다희는 눈 쌓인 골목에 혼자 남았다. 인쇄소의 안은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안쪽에는 큰 기계 두 대와 다희 몸보다 큰 종이 무더기들이 쌓여
있었다.
다희는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제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윤제가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종이 뭉치를 맞는 장면, 그걸 치우느라 프레임에 사라지는
윤제의 모습, 난로에서 손을 잠시 녹이며 고되어 보이는 뒷모습, 테이핑을
하는 손 같은 걸 초점도 잘 잡히지 않으면서 계속 계속 찍었다.
눈이 녹을 때까지 해가 뜨는 인쇄소의 창밖을 보다가, 퍼뜩 생각이 나
인쇄소 골목에 다희가 생각난 윤제는 걸음을 창 가까이 해 그 여자애가
아직까지 있을까 살폈다. 윤제가 골목 어귀의 다희를 발견했다. 다희는
들킨 사람처럼 카메라를 눈 밑으로 내려 눈을 깜빡였다. 윤제는 눈을
가늘게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덜덜 떨고 있는 다희의 손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사장은
윤제에게 일을 맡기고 근처 다른 사장들과 점심을 먹겠다며 뒷문으로 나가
10분쯤 지난 시점이었다. 그 사람 그렇게 나가면 낮술을 하고 오후 인쇄를
죽쑤고는 윤제의 탓을 하기 일쑤였다.
윤제는 밖으로 나가 다희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카메라 렌즈는 다희의 눈을
가려 윤제는 다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학생, 안 추워?
- 좀... 추워요. 킁.
- 10분만 들어와 있어. 그리고 이제 집에 가.
다희는 별말 않고 인쇄소의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라고 그렇게 따뜻하진
않았다. 난로 쪽으로 다가간 다희는 바닥이 꽤나 닳았다고 생각하며 손을
녹였다. 얼마나 오래 일한 걸까? 다희는 나타샤가 점점 더 궁금했다. 배달
일을 하게 된 건 유추 가능한 일이지만, 인쇄소에서 일하는 것은 특이하게
여겨졌다.
한 발 더 들어가 본
느낌.
- 찍어도 돼요?
- ...
- 감사합니다.
막무가내로 카메라를 들고 인쇄소를 찍는 다희를 윤제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다희는 윤제가 테이핑을
하던 종이 박스들을, 기계의 부품들을, 아주 오래된 것 같은 컴퓨터 같은
걸 찍어댔다. 어디까지 나타샤의 손이 닿았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구석
어딘가에 학생의 포트폴리오로 추정되는 것이 보였다. 나타샤 원래는
예술하는 사람이었을까? 그러면 내가 하는 게 어설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찍어댄 다희의 카메라 렌즈는 다시 윤제를 향한다. 윤제의 붉게
터버린 손을, 그리고 뭐가 잔뜩 묻은 체크색 셔츠를, 수염이 사라진 어느새
앳되어 보이는 윤제의 얼굴을. 윤제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렌즈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희는 렌즈 속
울컥거리는 윤제의 목울대를 포착했다. 짓이겨지는 담배와 텅 비어 있는 듯
화가 난 저 눈도.
- 학생. 그만
나가줘.
다희는 윤제의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다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인쇄소의 문을
도망치듯 열고 버겁게 닫으면서 이윽고 사라졌다. 윤제의 담배가 찢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윤제는 이윽고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종이 가루와
담뱃잎이 사이 좋지도 않게 뭉쳐 담겨진다.
-
윤제는 새벽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전 5시였다. 오늘 다희의 집으로는 배달이 뜨지
않았다. 자신이 놓친 것일 수도 있을 테지만, 무엇이든지 뜨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보일러는 다시 18도로 맞춰두었다. 적당히
냉랭했다.
해가 뜨면 돈을 내러
병원으로 가야 했다. 시계를 보니 잠을 잘 새가 없다. 병원에 돈을
수납하고 바로 출근을 해도 빠듯하다. 윤제는 눈이 뻐근했다. 눈만 뻐근한
게 아니라 손마디, 허리, 아니 온몸이 멍이 든 것처럼 저렸다.
전화가 걸려왔다.
- 오빠, 애 열이
안 떨어져서 지금 응급실이야.
- 어.
- 나 곧 출근해야 하거든? 그리고 이제 진짜 안 될 것 같아. 오빠가 주는
생활비로는 승우 더 못 키워. 오빠는 애 어린이집 비용만 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애가 얼마나 자주 아픈지, 돈이 또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모르지?
오빠는...
- 알았어. 갈게.
윤제는 5살 먹은 자신의 자식을 생각한다. 한 달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아들. 사랑했었던 여자의 얼굴은 보이는데 자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서,
윤제도 그걸 모르지 않아서 더 끝내 얼굴 보기가 힘든 아들.
윤제는 엄마의 입원비를 미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인쇄소로 다희가 찾아왔다. 캔커피와 데워온 편의점 도시락이 손에
있었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사장이 윤제보다 먼저 나왔다. 윤제는 군말 없이 찾아온 사람을 보지도
않고 커터기를 내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어린 목소리가 들린다. 다희의
목소리다. 사장님 하면서 무슨 말을 하는데 인쇄기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윤제는 고개를 돌려 문가를 쳐다본다. 사장을 설득시킨 건지
다희는 이윽고 안으로 들어왔고, 사장은 웃고 있었다.
- 어린 학생이, 이런 거 찍어서 나라에다 알릴 거라고?
- 네, 열심히 일하시는 거랑, 이런 산업이 있다는 게요, 외국에서도 되게
주목해요. 사장님 일하시는 게 지금, 엄청 중요한 거 하시는 거잖아요.
사장님도 다 아시죠?
- 허허, 웃기는
학생이네. 그래. 찍고 싶은 거 찍고 가.
-
사장님도 한 말씀 해주셔야 돼요! 나라에다가 여기 처우 좋게 해달라고
제가 다 찍는 거니까요.
다희는
윤제를 부러 보지 않았고, 윤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희는 윤제가
떨어뜨리는 종이 조각 위에 편의점 도시락을 내려놓고 마저 사장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다희는
카메라를 켜, 인쇄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환풍기와 칠
벗겨진 벽을 찍었고, 커팅 작업을 하는 윤제의 뒷모습을 찍었다. 초점은
윤제의 목덜미에 닿고, 이윽고 윤제의 머리로 프레임은 확대된다.
버려진 종이 더미에 올라간 도시락은 조금씩 식고 있었고, 다희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사장은 큰 소리로 말을 한다. 여기서부터 내가 장장 40년을
있었고...
다희는 사장에게 맞추던
초점을 거울로 옮긴다. ○○인쇄 30주년 (Since 1996). 스티커가 다 닳아 뭘
축하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 그 반사판 너머로 윤제가 보인다. 윤제의
묵묵한 얼굴이. 닳아서 잘 모르겠는 그 표정이. 종이를 옮기느라 사라지는
머리카락이.
- 감사합니다, 사장님.
진짜 너무 잘 나올 것 같아요.
- 그래,
젊은 학생. 프린트 맡길 거 있으면 싸게 해줄게! 찾아와.
다희는 카메라를 안고 연신 감사 인사를 한다. 그리고 커터기에 서 있는
윤제를 지나쳐 걷는다. 윤제는 다희를 바라봐주지 않는다. 다희가 문을 열
때, 마침 윤제는 다희를 바라보았고 다희는 할 말이 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깜빡인다.
인쇄소에서는 기계
소리와 커터 소리만 가득하다.
사장이 밥을
먹고 오겠다며 문을 나선다.
윤제는
여전히 커터기 앞에 서 있다. 셔츠 주머니에 넣었던 담배갑을 꺼내 든다.
한 개비가 남았다. 그리고 주저앉아 버려진 종이에 가려진 도시락을
주워든다. 젓가락과 5만 원 두 장이 고무줄로 같이 묶여 있다. 윤제는
고무줄을 풀어 현금을 셔츠 주머니에 넣고, 입에 담배를 물고 인쇄소 문을
나선다.
다희가 골목 어귀 먼 곳에서
자신을 찍고 있다.
윤제는 다희를 한
번 보고 개의치 않는 듯 담배를 피운다. 겨울이라 그런지 담배가 타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린다. 기분은 어떻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별로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윤제는 담배를 지져 끄고, 다희를 향해 손짓한다.
다희는 카메라를 내리고 윤제에게 다가온다.
- 학생, 저녁 사줄 테니까, 추운데서 있지 마.
- 킁, 네.
그렇게 두 사람은 제대로
전화번호를 공유하고,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저녁은 짜장면을 먹었다. 윤제가 탕수육을 먹겠냐고 했지만, 다희는 고개를
저었다. 다희는 별말 없이 먹다가, 세 입을 먹은 후에는 윤제의 모습을
촬영했다.
- 학생, 분다.
윤제가 다희의 짜장면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다희는 촬영을 멈추고, 다시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윤제는 짬뽕 국물을 젓다가 찾은 홍합 하나를
다희의 그릇에 얹어주었다. 그 장면을 찍을 걸! 다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윽고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먹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희의
첫끼였다.
그 이후 윤제의 일과는
배달이었다. 윤제는 다희에게 자신의 헬멧을 씌워주었고, 그 덕에 다희는
카메라를 키기가 아주 어려웠다. 초점이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르게 윤제의
뛰어가는 모습을 찍어내고, 다시 윤제를 안고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음식점과 집으로 이동되었다. 카메라를 꼭 잡고 달리는 거리를 촬영했다.
기기를 떨굴까 봐 무서워 죽을 것 같았지만 한 팔로 윤제를 안을 때면
이상하게 윤제의 오토바이는 조금 천천히 달려주는 듯했다.
새벽 5시, 윤제는 다희를 다희의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 감사합니다, 아저씨.
- 들어가요.
윤제는 별 표정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희는 그런 윤제의 뒷모습을
촬영했다.
-
윤제는 은행이 여는 9시까지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윽고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자신의 계좌에 20만 원을 넣었고, 이윽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통신비와 보험비가 하나 둘 결제되기 시작한다.
다희의 어리고 반짝거리는 눈을 생각한다. 그러나 카메라의 빨간 불빛을
생각한다.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뜬다.
‘새벽 5시부터 아저씨 집에서 촬영해도 될까요?’
윤제는 실제로 배와 목 언저리에서 무언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눈이
빠질 듯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손마디에 힘을 주었다가 관절이 빠그라질
것 같으면 힘을 뺐다. 어디가 안 좋은 건지 알아챌 수도 없게 너무 많은
곳이 일그러진 듯했다. 그러나 윤제는 그런 것들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그저 뿌옇고 몽롱한 시야에서 메시지 창에 ‘네.’라고 띄워 보낼
뿐이었다.
모든 게 피곤했다.
-
정신을 차려보니 다희가 눈앞에
있었다.
- 아저씨, 피곤하세요?
맞다. 윤제는 새벽 배달을 끝내고 다희의 집을 들려 다희를 등 뒤에 앉히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윤제는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보일러
온도는 24도. 눈이 온 날처럼 따뜻했다. 오늘 내가 돈을 받았었나?
- 아저씨, 왜 우세요?
윤제의 눈물이
얼굴의 패인 곳을 따라 흘렀다. 윤제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처럼 허공을 보고 있다.
다희는
앉아 있는 윤제를 안았다. 윤제가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있는다. 다희의 손이
윤제의 뒷목을 감싸 기댄다. 윤제는 고개를 돌려 다희를 밀어낸다. 다희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다가 다희의 입술이 윤제의 입술에
포개어진다. 윤제는 조금 더 세게 다희의 어깨를 밀어낸다.
정지.
윤제의 입이 달싹인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다희의 이마가 윤제의 이마에 닿아 한동안을 있는다.
윤제의 숨이 이상한 소리를 낸다. 다희는 윤제의 목에, 윤제는 다희의
허리에 팔을 감싸고 한동안을 있는다.
정지.
윤제는 열이 오른 이마를
다희의 목 언저리에 내려놓아 고개를 젓는다. 다희가 윤제를 더 세게
끌어안는다. 윤제가 힘을 주어 버티어내다 결국 다희를 온몸으로 안는다.
역시 한동안을 있는다. 다희가 움찔거리자 윤제는 다희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준다. 윤제는 이윽고 힘 빠진 다희의 겉옷을 벗기고 고개를 들어 입을
맞춘다. 다희가 바닥에 주저앉는다. 윤제가 다희의 위에 그림자를 씌운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다희의 카메라는 불빛을 내며 싱크대 위에 놓여 있다.
-
해가 이젠 떠버려 윤제의 집에
빛을 어렴풋이 쏘아댄다. 윤제와 다희는 벌거벗은 채로 겉옷을 이불처럼
덮고 누워 있다. 먼지가 떠다니는 것도 볼 수 있다. 윤제는 다희에게 한
팔을 내어준 채 천장을 바라본다. 다희는 그런 윤제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다희는 손을 뻗어 윤제의 눈가를 만진다.
윤제는 그런 다희의 손에 찌푸리지도 않는다. 거슬하게 올라온 수염을
손등에 비빈다. 그리고 패인 주름에도 괜히 손톱으로 따라 그려본다.
- 학생, 그만합시다.
- 뭘요?
- 그냥 다.
다희는 윤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분명 무언가 부글거리는 눈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아주, 슬퍼 보였다.
다희는
말없이 있다가 일어섰다. 그리고 싱크대로 다가선다. 세제로 손을 박박
닦아낸다. 입을 헹군다. 그리고 문가에 걸린 수건으로 손을 말린다.
카메라를 집어든다. 녹화를 멈춘다. 다시 윤제에게 다가간다. 녹화를
시작한다.
- 한 번만 다시
말해줘요.
- 학생.
- ...
- 그만합시다.
- 뭘요?
- 그냥 다...
말을 다 끝낸 윤제는 울고 있다. 다희는 멈추지 않는다. 이번에 윤제는
아이처럼 목놓아 운다. 윤제가 주저앉는 바람에 다희의 카메라는 허공을
찍는다. 다희는 울지 않았다. 대신에 식탁에 5만 원 두 장을 얹고 카메라를
정리한다.
다희가 집을 떠나
집안에는 윤제만이 남았다.그리고 윤제의 겉옷만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다희는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낮 11시부터 8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으면 10시, 그리고 새벽 5시까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일은 힘들지는 않았으나 앉아서 있을 수도 없었다. 빵이
줄어드는 걸 바라보는 게 다희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케이크를 사기도
하고, 어린 아이들은 쿠키를 사거나 빵을 찌르고 가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빵들은 이곳에서 나간다. 퇴근한 다희의 몸에서는 단내랑 기름
냄새가 나서 집에 오면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폐기로 남은 빵을
대충 우겨넣으면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대체로 시시한 편에 속했다. 그냥 사람이 나와서 그
사람을 졸졸 뒤따라가면 모르는 세계가 있었다. 다희는 바게트를
뜯어먹으며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을 알고 지낸다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가끔 화면 속의 사람은 다희를 응시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땐 다희는 눈을 감고 빵 조각을 삼켰다.
그때 다희는 문득 메일함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귀하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다희는 다시 읽어보았다.
귀하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다희는 자신의 영상을 다시 돌려보았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윤제의 얼굴이 나오면 재생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윤제가 수도관을 열 때의 손, 담뱃불을 가까이하는 풍경에서도 또
멈추어 바라보았다. 윤제의 손끝은 상해 있었고 얼굴 표정은 다양하지
않았다. 윤제의 등 뒤에서 찍은 도로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인쇄소
거울로 비치는 윤제의 얼굴도. 배달을 하다가 담배를 피우는 윤제의
옆얼굴들이 차례로 지나간다. 주황색 가로등이 점점이 이어지는 골목이
느리게 스친다. 둘의 밤이 몇 번을 겹쳐진다.
그리고 마지막. 윤제의 우는 눈과 사라진 얼굴. 허공.
수도관이 얼지 않게 살짝 물을 틀어 둔 싱크대는 내내 누구 대신 우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