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커피숍은 미지의 세계, 어른들의 세계,
선망의 대상이었다. 뚱뚱이 브라운관 티브이에서 잘 차려입은 남녀가
다방이나 커피숍에서 근사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며 저기는 어떤
공간일지 늘 궁금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술·담배도,
파마도, 염색도 아니라 커피숍에 가보는 것이었다. 수능을 친 겨울,
커피숍을 가보았다는 친구를 따라 드디어 온양 시내에 있는 한 커피숍에
입성했다.
간판에 달린 로고는
클래식했다. 고급스러운 벨벳 녹색 바탕에 LP 판 같은 빨간 원 모양이
한가운데 꽉 차게 자리 잡고 원 한가운데를 커피색 테두리를 한 연베이지색
넓적한 띠가 가로지른다. 그 위에 커피색 잉크로 무심한 듯 로즈버드라고
흘려 썼다. 그 위에는 반원을 따라 작은 글씨로 '원두커피의 名家', 아래
반원에는 'ESPRESSO COFFEE'라고 쓰여있다. 로즈버드의 '버'자 위에는 빨간
커피콩과 잎이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얹혀있다.
좌석은 기차간처럼 칸막이에 마주 보며 네 명씩 앉는 구조였다. 우리를
이끈 카페 유경험자 '신'이 착석 후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를 느릿느릿
꺼냈다. 에세였다. 우아하게 한 모금 빨고 실 같은 연기를 피워올렸다.
실내 흡연 금지가 시작되기 전, 21세기가 동터올 무렵이었다. '신'은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자퇴한 대구 남자애 이야기를 했다. 충남에서 나고
자란 우리에게 대구는 아득히 먼 미지의 세계였고 거기에 사는 자퇴한
남자애의 이야기는 신비로웠다. 신은 나를 가리켜 '난 네 남자 친구가 제일
궁금해'라고 했다. 일곱을 사귀어서 요일마다 바꿔 만날 거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 막연한 기대와 불안이 넘실댔다.
"미용실에서 일해요."
"아, 직업
중에 가장 높은 직업이시네요. 사람들 머리 꼭대기에 있으니까요.
하하하"
수능을 갓 마친 여고생
3인방 뒤편 칸막이에는 소개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낼 수 없다는 결의에 찬 남녀가 주선자와 함께 어색한 분위기를 으쌰으쌰
이끌어가고 있었다.
우린 일순
목소리를 낮추고 웃음을 크크큭 참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라디오 듣는 것 같아..'
앞니가
다람쥐처럼 튀어나온 뮬란이 속삭였다.
그렇게 카페 첫 경험을 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혜화역 4번 출구에서 학교
정문으로 가는 길, 뜻밖에도 짙은 녹색 바탕의 빨간 동그라미 간판을
보았다. 낯선 서울에서 반가움이 일었다. 지갑에 고이 꽂혀있는 로즈버드
쿠폰을 속으로 만지작 거렸다. 칸막이는 없고 개방형 테이블에
통유리창이었다. 복덕방 할아버지 풍의 중노년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커피 한잔하고 있었다. 서울은 카페 손님 연령층 폭이 넓구나, 온양에는
젊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싶었다.
학교 앞 로즈버드는 6년간 짝사랑한 남자애에게 차이고, 호프집 알바를
하고, 광화문에서 구호를 외치고,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사이 이디야에
자리를 내주었다.
지난해 6월, 일산
KINTEX에서 열린 서울 푸드 전시회에서 '로즈버드'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아니, 이게 아직도 있어요?" 하면서 부스를 지키는
직원에게 외쳤다. 커피숍 사업은 사라지고 원두 납품 위주로 커피 사업을
이어 나가고 있단다. 알고 보니 로즈버드는 미원으로 유명한 식품 기업,
대상 그룹이 만든 브랜드였다. 대상은 1999년 커피숍 가맹점 모집 공고를
내기 시작하여 2000년대 초 한 시대를 풍미했다. 2001년 로즈버드 매장
수는 131개로 스타벅스(25개)보다 100개 이상 많았고, 전성기였던
2007년에는 전국 250곳으로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중 1위를 차지했다.
이제 10만 카페 시대, 카페라는 공간도 변화했다. 갓난아기를 대동한
보호자부터 청소년, 노인까지 부담없이 찾는다. 특별한 만남을 갖지
않더라도 혼자 드나들기도 한다. 열 여덟 살 청소년이 기대에 부풀어 첫
발을 디딘 카페, 로즈버드는 국내 커피 전문점 프랜차이즈 브랜드 1호로서
카페의 문턱을 낮춘 시대의 신호탄이 되었다. 장미 꽃봉오리처럼 젊다는
사실에 한껏 고취되었던 시절은 로즈버드와 함께 바래졌지만, 어릴 적
카페에 품었던 호기심은 공간을 감상하는 마음의 씨앗이 되어, 낯선 장소를
찾을 때마다 설렘으로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