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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백권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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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도서
『죽은 다음』,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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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때
열아홉 살엔 죽음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다. 경도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다. 가끔 죽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죽음 자체가 주는
철학적 의미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사방에 물어댔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할까?
엄마는 사는 데 딱히 이유가 없다고 했다. 원래 그런 거라고. 그말을 듣고
꽤나 외로워졌다. 한동안 우울했다.
그 때 나의 좌우명은 '오늘 죽어도 후회 없는 삶을 살자'였다. 그래서 당장
죽을 수 있다는 걸 까먹지 않으려고 애쓰고, 더 솔직하게 표현하고, 하고
싶은 건 해보고 그랬더랬다. 그런데 어쩐지 나이가 들수록 죽음이
멀어져가는 것 같다. 오늘 길을 걷다 트럭에게 치인다면 해보지 못한 일이
수도 없이 생각나겠지.
죽음이 멀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가깝고 먼 죽음을 지켜보면서 죽음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초점이 ‘왜 살(죽)지‘에서
‘어떻게 죽지‘로 바뀌어 가고 있어서 같다.
<죽은 다음>은 말 그대로 죽은 다음, 즉 장례를 다룬다. 그 중에서도
노동의 시선으로, 작별을 떠받치는 일을 다룬다. 숭고하기도, 지독히
세속적이기도 한 노동.
염장이, 장례지도사, 의전관리사, 수의제작자, 선소리꾼, 화장기사 등등.
잘 보내는 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을 저자는 만난다.
그들의 직업윤리가 좋았다. 아무도 알 수 없어도, 자신의 방식대로 망자를
보내겠다고, 이미 감각 없는 얼굴에 립밤을 바르고 방역수칙도 어기고 받은
돈을 선뜻 내놓는 마음들. 죽음을 다루는 영역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더 좋았던 부분은 파도가 거세게 쳐도 장례를 치뤄주기 위해 배를 띄우는
사람들(201p). 인간은 왜 그렇게까지 하나? 그 이유는 불가해한 세계에
불안정한 삶을 어떻게든 가해한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일까(205p).
물론 모든 노동자가 최선의 태도를 지닌 건 아니다. 내 소중한 사람이
제대로 몸을 닦지도 못한 채, 욕설을 들어가며 타야 한다면 화가 나겠지.
하지만 오로지 그들만의 탓이 될 수 없음도 안다. 애초에 시간은 짧고
사람은 적고 일은 쪼개는 불안정한 환경이 아닌가.
죽음은 너무나 관례화되었고 과시의 대상이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애도조차
어렵다. 그러니 많은 부분에서 변화되기를 저자도, 나도 바란다.
과거의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폄하하기는 쉽다. 그런데 가끔은 비판의
과정에서 어찌 됐든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가 돋보인다. 오늘날엔
당연히 비합리적인 일에 대해서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어떤
’망설임(376p)’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왜 이태원 참사에는 함께 아파하고, 외국인 산재 노동자에게는
그러지 못하냐는 질문(357p)도 날카롭게 다가왔다.
내가 갔던 장례식을 생각한다. 인사 하고 꽃을 올리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울고 술을 따르는 모든 일이 지독히 과시적이고 공연적이었다. 일종의
씻김굿처럼. 그게 지나치게 피로해서 장례식장을 나설 땐 아 얼른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그 모든 순간순간에 (당연하게도)노동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서
새삼스럽다. 그들이 그만큼 프로페셔널했다는 뜻이겠지(사별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책을 덮은 지금부턴 앞으로 맞이하는 죽음엔 노동자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더 잘 보일 것 같다.
요즘은 죽음이 곁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매년 유서를
쓰고 꼬깃하게 접어 지갑에 넣어 다닌다. 어떻게 죽고 싶은지 생각하고,
어떤 마음으로 보내줘야겠다고 다짐한다.
삶이 투쟁이듯 죽음도 당연히 투쟁이다. 죽음에서까지 소외되고 싶지
않기에, 디테일이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어디에선가는 그런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사람이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