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얼마 전 난잡한 남자관계를 여자친구에게
들켜 뺨을 맞았고, 동거하던 그녀를 피해 서울에서 부산으로 도망왔다.
이유는, 가장 머니까. 짐은 어떻게 하지. 전기세랑 수도세는 어떻게 해야
하더라. 내가 아끼는 조명을 걔가 부숴버리면 어떡하지. 그러다가 걔가
손이라도 다치면 어떡하지. 근데… 그거 아직 할부인데.
소희는 여자친구에게 온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지만 다시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이예지 부재중 172통.
소희는 머리를 한 번 쓸었다가손에 한 움큼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사실 여자친구에게 뺨만 맞은 게 아니라 머리채도 뜯겼기
때문이다.
소희는 예지가 좋아하는
걸 생각해본다. 최근에 시계를 사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사과를 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그 가느다란 손목에 어울리는 시계를 사려다,
자신도 문득 액세서리를 갖고 싶어 두 개를 샀다. 걸어 다니며 가게들의
통창으로 언뜻 보이는 소희 자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확인했다. 쥐어뜯긴
자국이 펴지지 않은 머리, 부어오른 얼굴과 할퀴어진 팔, 그리고 얹어진
은색 메탈의 여성스러운 시계.
역시
답이 없는 모양새. 그러나 손목에 무게가 얹히니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걷는
것 같아 조금 덜 외로웠다. 갈 곳이나 찾아갈 사람은 딱히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번호를 물어보고 그러고 싶었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전봇대에
튀어나온 못에 손목을 주욱 찢었다. 너 아무나 만나는 거 그것도 자해야 -
라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소희는
광안리 해변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앞에 혼자 서서 얼마 전 지웠던 만남
앱을 앱스토어에서 파도가 들이치면 내려받고, 파도가 바스라지면
삭제하기를 반복했다.
신발을 벗어
양말은 대충 신발 안에 구겨 넣고 맨발이 되어 바다로 들어갔다. 해변은
금연구역인 것 같은데 바다는 금연구역이 아닐 것 같다는 소희의 생각이다.
무릎까지 바닷물이 찼을 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시계를
찬 손으로 무겁게 담배를 피우다가 눈물이 나지 않아 일부러 눈 가까이에
담배를 댔다. 연기가 매캐해 눈물이 고이긴 했으나 흐르지는 않았다. 아까
그은 자상에도 붉은 핏방울만 알알이 맺히고 역시 흐르지 않았다. 그걸 본
소희는 이제 그다지 투명하지 않은 바닷물에 꽁초를 버린다.
한낮이라 하늘에 구름이 꼈는데도 더웠다. 흠뻑 젖은 꽁초가 놀리듯 바다
표면에서 춤을 춘다. 꽁초가 바다를 떠돌다 보면 출생지인 바다 건너편까지
닿을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난 곳이 부산이랬는데, 어디쯤일까. 엄마 아빠는
왜 불 붙이듯이 사고를 쳐서 나를 지구에 던졌을까. 소희는 자신을
흐물흐물한 담배에 비유하는 자신이 웃겨져 아빠에게 화라도 내려고 연락을
하려다가, 결국엔 용돈이나 달라고 할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바다를 나오기로 한다. 물이
자꾸 차올라 가만히 있었더니 발은 모래 안으로 파묻히고 허벅지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소금물에 소독한답시고 바다에 팔을 손목까지 담가 한 번
휘휘 젓는다. 따갑다. 담배를 한 대 더 피울까 하다가 해변에서 엄마 손을
잡은 아기가 세상을 구경하고 있길래 그냥 입에만 물고 있기로 했다.
도로변에서 피우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 부지런히 자외선을 쬐며 해변을
벗어난다.
도망치듯 들어온 골목은
아스팔트가 이곳저곳 깨져 자갈이 굴러다녔다. 실수로 담배를 떨어뜨려
급히 입에 넣었다가 작은 돌을 같이 입에 넣어버렸다. 아작. 적잖이
아팠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소희는 공들인 피부 화장에 줄이 그어질까 봐
볼을 두드리며 쭈그린 채 눈물을 말린다. 동시에 입 안 돌을 퉤 뱉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핏물과 침이 뒤섞인 자갈이 하수구에 떨어진다. 하수구
안에서 뭔가 철퍽하고 굴러다니는 소리가 난다.
“얘.”
고개를 드니 허리를 전혀 숙이지
않은, 아주 꼿꼿한 자세의 소희 또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얼굴이 아주 익숙했다. 왜 이렇게 엄마를 닮았지?
“엄마?”
“내 딸치고는 생각보다 덜
예쁘네.”
“왜 젊어지셨어요?”
“젊어진 게 아니야.”
“그럼 누구세요?”
그 여성은 자신이
시간여행 중이라며 미래의 자신을 만났는데, 자식이 자살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나이는 스물다섯. 소희도 지금
스물다섯. 듣기로 엄마가 소희를 낳은 나이도 스물다섯이었다. 아직 아빠를
만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빠는 엄마를 만나자마자 엄마를 임신시켰고,
지금 눈앞의 여자는 배가 납작했기 때문이다. 아니야, 혹시 모른다. 파리한
얼굴과 묘하게 떨리는 손마디를 보면. 몇 가지를 더 물어보려 했으나
엄마라는 여자는 말하기 귀찮은 듯 보였다.
“아까 시간을 잘못 돌려서 오늘의
내일로 갔더니 네가 이미 죽어서 얼굴도 못 봤지 뭐야. 네 아빠라는 사람을
대신 만나게 됐어.”
“그래요?”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클러치 속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소희 손에 있는 라이터를 달라며 손을 까딱였다.
담배를 피우는 걸 보니 정말 아빠랑 사고 치기 전이 분명해. 어떤 여자가
임신했는데 담배를 입에 물겠어. 근데 내 엄마라면…
“그 남자 나한테 울면서 빌더라.
제발 자기를 만나지 말아달라고.”
“아빠가 그래요?”
“그래. 그리고
너는 애인을 몇 명이나 두는 거니? 도대체가 병원에 찾아온 애들이 죄다…”
말을 이으려던 엄마는 곧 입을
다물고, 됐다, 연기를 연거푸 뱉었다. 확실히 소희에 대해 어떤 감정도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엄마한테 연락은 하니.”
“제가 왜
해요.”
“너를 동생보다 덜
사랑하지는 않아 보였어.”
소희의
나이 든 엄마는 재혼을 해서 자식을 또 가졌다. 그래서 소희는 엄마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엄마 없이 큰 자신에게도 실례이고, 엄마와 함께 클
동생에게도 실례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소희의 목언저리 밑으로 몇 겹의
감정이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일부러 꺼내고 벗겨내 살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다고 엄마가 돌아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소희는 다섯
살 때의 엄마 모습을 마지막으로 엄마에 대한 기억을 업데이트하지 않았다.
연락처는 차단했고, 혹시라도 찾아올까 봐 밖으로 나돌았다. 그래도 가끔
차단을 풀어 프로필을 확인하곤 했다. 얼굴을 알아둬야 피하지.
변명이었다.
“네 여자친구가 나를
닮았더라?”
실제로 소희는
여자친구와 길을 걸으면 둘이 자매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했다. 그게
자신과 닮은 게 아니라 엄마를 닮은 것인지는 몰랐지만.
“봤어요?”
“응.”
“언제요?”
“내일. 사진으로.”
내일의 내가 죽고, 보호자 연락처로
전화가 가서 여자친구가 오는 건가. 근데 그러면 사진으로 볼 필요가
없는데. 어떻게 보는 거지? 그나저나 하루 종일 죽고 싶은 기분이긴
했지만, 내가 정말 죽나.약을 과다 복용하고 술을 위장에 들이부었을 때도
죽지 않았는데. 어떻게 성공했지?
그나저나 내일이면 보기 싫든 좋든 여자친구를 볼 수 있는 걸까. 시계를
주면서 미안하다고 빌어볼까. 그 애에게 연신 사과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품에 파고드는 상상을 했다. 좋을 것 같았다.
“밥부터 먹자.”
엄마는 앞장서는
듯하다가 이내 숨을 들이쉬고 뒤를 돌아 하가원이 아직 있느냐고 물었다.
하가원이라는 칼국숫집은 30년 전통의 맛집으로 유명하다. 여름에는
콩국수를 주로 판다. 사실 부산에 내려오자마자 먹어서 소희는 알고
있었다.
“있는데, 저 어제
먹었어요.”
“내가 먹고 싶은데.”
“엄마 진짜 젊을 때도 이기적이네요.”
엄마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 낳은 엄마한테 뭐라고
해. 나는 아직 뭣도 모르는 사람이야.”
소희는 엄마의 성깔머리 한 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엄마는
행복하기 어려운 성격이겠구나. 성질이 예민해서 이렇게 말랐나? 싫증도 잘
낼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혼했겠지. 재혼은 왜 했담? 소희는 자꾸
이렇게 눈앞의 여자가 내릴 결정들을 생각하다가, 종국에는 엄마를 이해할
것 같아 그만하기로 한다.
아무튼
엄마와 소희는 콩국수를 먹었다. 소희는 미적미적 먹었고, 엄마는 몇 입 잘
먹다가 배가 부른지 역시 미적미적 먹었다. 엄마는 역시 말랐다. 입이
짧아서 그런 듯했다. 그리고 나와서 아무렇지 않게 맞담배를 피웠다.
소희가 엄마는 입이 짧다고 하니 글쎄, 하가원 콩국수 맛이 변한 탓이란다.
웃기고 짜증 났다.
엄마는 피우던
담배를 다 피우자 한 대를 더 꺼내려 담뱃갑을 열었다가 탄식했다.
마음대로 찾아지지를 않는지 곧이어 웅크린 채로 가방을 거꾸로 들어
바닥에 쏟는다. 담배곽과 라이터, 식칼. 소희는 식칼을 보고 뭐 이런 걸
들고다니나 생각한다. 성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곽을 열어 확인한다.
“이럴 줄 알고 내가 넉넉히 담아서
왔는데….”
소희는 자신의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그러자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맛있어. 단종됐더라.”
“엄마,
이거 요거트 맛 나요.”
“요거트?
야쿠르트 같은 건가.”
“같은 거긴
한데요. 아무튼.”
“근데 너 나
엄마라고 그만 부를 수 없을까? 가출한 애들 같고 이상하다, 영.”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이름
불러.”
“성희야, 이거 요거트 맛
나니까 피워봐.”
“그래.”
성희와 소희는 요거트 맛 담배를 나누어 피웠다. 성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게 야쿠르트 맛이냐고 의아해했다. 소희는 그냥 웃고 넘겼다.
“레종 프렌치 요고.”
성희는 발음하며
갸웃거렸다.
“프랑스 야쿠르트는 이런
맛인가….”
그러다가 이윽고 시선을
소희의 팔로 옮겼다.
“그나저나 그
시계 예쁘긴 한데 너한테 지금 안 어울려.”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성희
너 가질래?”
“그래도 돼?”
성희는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받아들고 팔에 시계를 찼다.
“사랑하는
여자 주려고 샀던 건데, 내 것도 겸사겸사 샀었거든. 근데 안 어울려서 안
그래도 처치 곤란이었어.”
“흐응,
그렇구나.”
관심도 없어 보이네.
성희는
팔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사실은
정말 잘 어울렸다. 성희의 이목구비는 소희보다 화려하고 피부도 하얘서
여성스러운 디자인의 시계가 원래 성희 것인 양 빛을 냈다.
“기분이야.
안아줄까?”
“뭐?”
“안으면
기분 좋잖아.”
그러고는 성희가
소희를 덥석 안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피우던 담배가 성희를 지지지
않도록 팔을 엉성하게 뻗은 채, 목을 감싸 안은 성희가 넘어가지 않도록
뒤로 쏠린 몸을 버티며 소희는 힘을 주었다. 어떤 기분이 드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성희는 팔을 풀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소희는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본다.
성희는
소희를 바라보지 않은 채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담배를 피운다.
소희는 온 얼굴에 수분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기미를 느낀다.
성희는
담배를 한 번 털어 다시 빨아낸다.
“너는
뭐가 그렇게 쉬워….”
“뭐가?” 소희의
입과 코, 눈에서 체액이 흐른다. 이윽고 턱끝에 모여 방울져 떨어진다.
“안는
것도, 안지 않는 것도 왜 그렇게 다 쉽냐고….”
성희는
당황한 눈으로 소희를 바라보다가 담배를 지져 껐다.
“너
상처받았구나.”
성희는 이윽고
소희의 담배를 떨구고, 담뱃재 묻은 소희의 옷을 털어준 뒤 팔을 뻗어
소희를 세게 안았다.
소희는 한참을
울었다. 성희의 셔츠 어깨가 흠뻑 적셔질 때까지.
가게
에어컨 배수구에서 갑자기 물이 왈칵 쏟아져 소희의 작은 울음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 어느 저녁 골목길. 소희는 안겨 있는 탓에 성희의 표정을
알 수 없었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살펴보는 고질적이고 권태로운
생각을 했다가 이윽고 또 비슷하고 일상적인 생각을 했다.
“죽지
마.”
그 말을 들은 소희는 정신이
갑자기 돈 사람처럼 성희를 밀쳐낸다. 성희의 마른 팔들이 아무렇게나
내쳐진다. 동그랗게 커진 성희의 눈.
“내가
왜!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너가 내 마음 알아? 너 한 번도 엄마 품 기억
안 나는, 남들이 엄마 얘기할 때 나는 한마디도, 생리도, 남자를 만나는
것도, 또, 나는 하다못해 결혼을 해도 있잖아. 아니, 너는, 너는 절대
몰라. 너는 나 절대 이해 못 해. 내가 죽고 싶은 것도 다 너 때문이야.”
“김소희.”
“이름도 부르지 마! 왜 너
이름이랑 내 이름이랑 비슷하게 지었어? 왜 그랬어? 아빠는 왜 만났어?
아빠가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왜 그런 거야 도대체? 왜 다들 안
행복하면서, 근데 있잖아, 너 나 두고 도망은 왜 갔어, 그럴 거면 나 왜
낳았어 너. 왜 더 안 행복한 사람만 세 명, 아니야 나는 내 주변을 다
망쳐, 나는 대체 왜….”
소희는 소리를
지르다가 골이 울려 비틀거렸다.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의
엄마라니. 그렇잖아. 이거 다 미친 얘기야. 내가 정신병자라 주변을 다
엉망으로 만들고, 그런 이유는 다 엄마 아빠가 병신 정신병자여서야.
“내가
너 미래를 진짜 죽도록 미워해.”
그
말을 하는 소희의 눈은 잔뜩 핏발이 섰다. 소희는 그 말을 끝으로 성희를
뒤로한 채 도망갔다. 성희는 소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가게 간판의 붉은빛이 소희의 헝클어진 머리를
비추다가, 멀어질수록 점점 그 머리가 까매졌다. 성희는 소희가 사라진
방향으로 몇 걸음을 뛰다가… 소희를 놓쳤다. 그리고 이윽고 거리에서는 둘
다 찾을 수가 없었다.
-
그날 밤, 소희는 호텔 베란다에서
취한 채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리고
예지가 조명의 전선을 질질 끌며 미친 사람처럼 핸드폰의 위치 추적 앱
화면을 확인하며 거리를 걷는다. 동시에 내 사랑이라 저장된 번호에
234번째 전화를 건다. 여전히 화면은 소희의 위치를 보여준다.
뛰어가던
여자와 골목 어귀에서 부딪힌 예지는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핸드폰을 보며
발걸음을 이어간다. 뜀걸음 소리가 멈추었지만 예지는 전혀 들리지 않는
채로 한 손에 조명을,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정신없이 걸어간다. 찍혀
있는 호텔이 코앞이다.
호텔 로비
직원의 수상한 눈빛에도 예지는 자신의 친구가 자살 시도를 하는 것 같다며
결국 소희의 호수를 알아낸다.
예지가
투명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올라간다.
여자가
그 모습을 호텔 앞에서 지켜본다.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여자는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를 확인한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여자는 호텔에
뛰어가듯 들어간다.
예지는 소희의
룸 번호를 확인하고, 조명을 들어 문을 쾅쾅 두드린다. 비틀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자마자 예지가 소희의 얼굴과
혼자인 모습을 확인하곤 안도하는 표정을 잠깐 짓다가, 곧 소희의 조명으로
소희의 머리를 깨버린다. 문이 닫힌다. 유리 조각 몇 개가 문틈에 끼어서
복도에 그 둘의 실루엣이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한다.
복도에 울리는 켁켁대는 소리. 찧는 소리. 살가죽이 부딪히는 소리.
문
안의 소희는 예지에게서 도망쳐 가방에 다다른다. 소희의 뺨과 눈, 머리가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 취해버린 소희의 머릿속에 시계가 신처럼
떠오른다. 시계, 시계를 주면 내 여자가 마음을 풀지도 몰라. 시계를
찾으려 가방을 뒤지지만 소희의 머리카락 만 떨어질 뿐이다. 손가락이 자꾸
가방 안 주머니들에 걸려 빠지지를 않는다. 예지가 소희의 등에
다가선다.
쿵.
별안간
소희의 등 위로 예지가 엎어지면서 소희와 가방 모두 바닥에 쓰러진다.
기적처럼 시계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소희는 웃는다.
“김소희.”
소희는
고개를 돌려 멍청한 얼굴로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여자가
헉헉대며 칼을 쥐고 벌벌 떨며 울고 있다.
칼에
찔린 예지는 신음하다가 역시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의 팔목에 반짝이는
시계가 예지의 눈에 들어온다. 바닥에 떨어진 저… 시계도.
“성희야.”
이제
예지는 완전히 돌아버린다.
“미친년들.”
예지는 번뜩 일어나 성희의 손에 든 칼을 뺏으려 달려든다. 성희가
뒷걸음질 치지만 예지는 그대로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성희의 몸이
낭창거리며 휘청이고, 둘은 엉킨 채 침대 다리에 한 번 부딪히고 베란다
유리창에 몸을 박는다. 예지는 칼을 쥔 성희의 손 가락을 하나씩 파내고,
성희는 손가락이 뒤틀리는 통증에 악을 쓰면서도 칼을 놓치지 않는다.
소희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예지의 등허리가 피로 젖어 있다. 피를
막 아야겠다고, 소희가 뒤에서 예지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그러다 성희의
손가락마디가 이상한 방향으로 어그러지는 것을 본다. 성희가 비명을
지른다. 소희는 예지의 등에 손톱 을, 아니 손가락을 박는다. 예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젖힌다. 손에 힘이 풀린다. 성희는 그 순간
꺾인 손가락에 악을 쓰며 힘을 주고 그대로 밀어버린다.
푹.
…
콜록.
예지가
배에 칼이 박힌 채 콜록인다.
입이 벌려지고
눈이 벌려진 채로.
한참을 콜록거린다.
예지의
얼굴이 벌겋다가 창백해진다. 피가 바닥으로 왈칵 쏟아진다.
한참
시끄럽던 호텔방이 고요해진다.
성희가
예지의 배에 꽂힌 칼에서 손을 떼고 더듬거리며 뒷걸음질 친다.
예지는
온몸이 굳은 채 여전히 성희의 시계를 생선 같은 눈으로 빤히 바라본다.
성희는
울면서 자신의 꺾여버린 손으로 그 팔목을 가린다.
예지가
피를 뿜으며 소희의 품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그 뒤에 소희, 성희와 눈이 마주친다. 피투성이의 네 손이 오갈 데 없이
가만 히 자리했다.
소희가 예지 몸에
박혀 있던 손을 빼낸다. 성희가 뒷걸음질을 치다 화장대에 몸을 부딪힌다.
성희가 얼빠진 얼굴로 울기 시작한다. 예쁜 얼굴이 알 수 없는 감정의
표정들로 일그러지고 곧 예쁘다고 볼 수 없는 얼굴이 된다.
성희가
아이처럼 소리 내 운다.
소희는 취한
그 여느 느리고 투박한 동작으로 예지의 배에 박힌 칼을 몇 번 힘주어
빼낸다. 피가 소희의 얼굴에 튄다. 소희는 덜덜거리는 팔로 얼굴을
훔치고는 성희를 처음 본 그 표정으로, 입을 뻥긋댄다.
“성희야.”
…
“도망가.”
성희는
울며 소희의 이어지는 행동을 지켜보기만 한다. 소희는 아기를 안아
달래듯이 이미 굳어버린 예지를 뻣뻣하게 흔들고, 그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머리를 부비다가, 예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상처를
누르다가, 예지의 손에 칼을 쥐여준다. 떨려서 흔들리는 손을 겹쳐 꿈쩍도
않는 손을 잡는다.
성희가 정신을
차려 말리려 손을 뻗었을 때 소희는 이미,
퍽.
소희는
서랍장에 머리를 박으며 동시에 자기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그래야 한
번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가 아픈지 목이 아픈지 헷갈릴 정도로
아프게 박을 생각이었다.
충격 탓인지
소희의 시야에는 성희의 얼굴이 초점이 잡히다 안 잡히다 한다. 문득
소희는 그런 성희를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품에 깊게 안아서, 아주
소중하게. 낮에 성희가 소희를 안았을 때처럼 말고, 아주 오랫동안, 힘을
주어 팔을 감은 채로.
다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대신 소희가 해줄 수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소희는
입을 뻥긋거린다.
이제는 소희도 꼭
생선같은 눈으로,
잘 움직이지 않는 혀와
입술로, 도망가, 도마, 도가, 가,
그리고
확인한다. 자신이 말했던 대로 도망가는 성희의 모습을. 울면서, 다리를
절뚝 이며, 고꾸라져 넘어졌다가, 울다가, 일어나서 뒤돌지 않고 도망가는
그 모습을.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그 사이 성희의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방문은 이번엔 틈도 없이
닫히고,
다시 정적.
소희는 죽어버린 연인의 몸에서 나오는 피를 막고 싶었지만 손을 들 수
없었다. 바닥이 점점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본인의 것인지도 역시 알
수 없었다.
아직 죽지 못한 소희에게
끔찍한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나 곧 끝이 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소희의
몸이 굳어온다. 숨이 아주 무거워진다. 두통과 복통이 온몸에 감겨서 졸린
기분이 아닌데 눈이 자꾸 깜빡였다. 아주 울고 싶었으나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등이 저려온다. 발끝부터 손끝까지 자글거리게 저려온다.
마지막으로
소희는 성희를 생각했다.
끔찍하게
사랑했던 것 같다고, 엄마가 없다고 놀림을 받을 때에도.
이렇게
내가 죽을 때에도.
이곳에서 도망쳐서 나를
낳을 때에도.
나를 두고 다시 도망칠
때에도.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