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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지렁이

    도연과 나는 종종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다. 우리가 사는 빌라에서 십 분 거리에 한강이 있다. 그 방향을 향하는 나와 달리 도연은 비슷한 거리에 있는 시장 쪽으로 몸을 돌린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는 시장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는데도 그곳으로 가려는 이유는 야식으로 먹기 좋은 횟집이 문을 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대부분은 한강으로 가게 된다.

     매년 장마가 시작되면 우리는 보행로 바닥을 유심히 지켜보며 걷는다. 비가 오는 밤이면 인적 드문 공원에서 반들반들하게 빛을 내며 기어 다니는 지렁이를 만날 수 있다. 비구름이 지나간 후에는 프라이팬 위 고기마냥 무자비하게 구워진 지렁이들이 살아 움직이는 지렁이보다 더 많다.

     한여름에 지상을 드나드는 지렁이는 상태에 따라 단계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 막 흙에서 나와 촉촉함을 잃지 않은 지렁이. 그들은 건조한 콘크리트 바닥을 활주한다. 빠르게 수분을 잃어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본인이 향하는 곳이 위험천만한 자전거길이라는 것을 모른 채, 확신에 차서 전진한다. 지렁이에게는 눈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

     2단계. 이미 치명적인 건조가 시작됐다. 1단계 지렁이들과 다르게 조금 더 느리게 움직이지만, 촉촉한 흙을 향한 모험을 포기하지 않는다.

     3단계. 그들은 아마 땅바닥에서 죽을 운명이다. 이미 움직이지 않는데, 심하게 건조해서 그런지, 혹은 어딘가 한 부분을 밟혀서 죽은 건지.

     그 이후 단계는 말할 것도 없다. 까맣게 타버리거나 개미 떼에 뜯기는 중이다.

     나는 어느 날 도연에게 그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예상과 달랐다.

     “그렇게 된 걸 좋아할 수도 있어.”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일까? 지렁이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안다면 왜 아무도 지상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지 않았을까?

     냉담한 말을 해놓았지만 도연은 건조한 지렁이를 볼 때마다 물 주기를 잊지 않는다. 단, 대상은 1, 2단계 지렁이, 즉 다시 건강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있는 지렁이에게만 한정된다. 우리가 물통을 가지고 있다면 안의 물을 모두 지렁이에게 퍼붓는다. 머리에 한 바가지 그리고 몸통에 두 바가지. 지렁이는 이 사건을 신이 내린 가호로 느낄까? 아니면 개그 방송에서나 나올 법한 물벼락을 맞닥뜨리는 기분일까? 깜짝 놀라 움찔한 지렁이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춘다. 그러다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바닥을 건드려 본다. 그 모습은 꼭 물을 마시는 것 같기도 하고, 길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지렁이 기분이 어찌 되었건, 도연은 남은 물줄기 끝까지 지렁이에게 양도한다. 길 한복판에 뜬금없이 작은 수영장이라도 생긴 것 같다. 그 수영장 속에서 온몸이 물에 잠겨버린 지렁이 모습을 보면 익사하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사실 지렁이는 물속에서도 며칠 살 수 있다.

     지렁이를 구하고(혹은 괴롭히고) 나서 잠시 후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오면 이미 지렁이의 모습은 없다. 힘차게 기어가다 결국 안전한 흙 속에 들어간 지렁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우리는 위안을 받는다.

     어느 날 물통을 깜빡 두고 산책에 나왔다. 덥고 온몸이 처지는 날이었다. 나는 힘없이 제자리에서 굼틀거리는 지렁이를 그냥 지나치고 있었는데, 도연은 재빠르게 어딘가로 뛰어갔다. 그러자 주변 공원에 설치된 음수대에서 물을 입 안 가득, 양손에 모아 담아 와서는 입에 품고 있던 물을 지렁이에게 쏟았다. 지렁이는 누군가의 침이 묻어있는 물을 좋아할까? 혹시 인간의 타액 속 바이러스가 지렁이에게 치명적이면? 나는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도연은 흡족해 보여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지렁이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도연은 “지렁이의 무의미한 죽음을 막고 싶어”라고 했지만, 나는 그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궁금증의 해답을 ‘도연이 전생에 지렁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쉽게 내린 결론이었다. 마치 공을 잘 굴리는 강아지를 보고 우스갯소리로 “전생에 축구선수였네”라고 하듯이, 몇 번의 여름이 지나도록, 그의 영혼 어딘가 지우지 못한 기억 때문에 지렁이에게 물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또 다른 여름, 우리는 평소처럼 강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물통은 텅 비었고, 음수대도 근처에 없어서 죽어가는 지렁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도연은 지렁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전생이 지렁이였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전생은 지렁이가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 통통한 지렁이를 낚시할 때 미끼로 쓰던 어부였던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도 바로 납득했다. 그동안 왠지 그는 지렁이 같은 면모가 없었다. 자연보다는 시장이나 건물 사이를 좋아했다. 흙을 좋아해야 지렁이지. 아무리 전생이라 해도 그게 지렁이의 특이점이 아닌가. 그가 시장을 좋아하는 이유도 잡은 생선을 납품하느라 정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그는 지렁이에게 갚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 같았다. 말하자면 죄의식, 은혜, 카르마 같은 것을. ‘미끼로 사용된 지렁이에 대한 죄의식은 윤회를 넘어섰다. 밤 잔 원수 없고 날 샌 은혜 없다’라지만 도연은 전생의 은혜를 잊지 않은 셈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무의식 속 잠들어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지렁이였을 이유를 찾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유치원 운동장에서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원생들과 염색 체험을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줄이 길었고, 햇빛이 너무 강렬했다. 나는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면서 잠깐 의식을 잃었는지 잠깐 다른 장소에 있었다.

     그곳은 깊은 숲이었고, 나는 흙바닥에 누워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살랑살랑 바람에 움직였고 그 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숲속은 아늑하고 친근했다. 매미의 합창이 이상하게 컸다. 나는 태어나서 유치원을 졸업할 때까지 잿빛 도시에 살았기 때문에 그런 장소에 가본 적이 없었다. 현생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기억하니 이것이 내 지난 생 마지막에 본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촉촉한 흙에 누워 있는 감촉, 압도당할 정도로 거대한 세상. 나 자신을 볼 수 없었지만 전생에는 숲에 사는 작은 생명체가 아니었을까.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 전생이 지렁이였다는 유력한 가설이 나타났다.

     튼실한 지렁이와 지렁이를 미끼로 사용하던 어부. 그 둘이 같이 한 집에 산다고 생각해본다. 어떤 우주의 힘으로 우리는 만날 수 있었던 걸까.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나선다. 다시 여름이 돌아왔다. 무더운 공기가 답답하지만, 동시에 여름 특유의 습기는 생명력의 꿈틀거림이 느껴져서 반갑다. 오늘은 한강으로 갈까, 시장으로 갈까. 난 한강이라고 말한다.

     내 전생이 지렁이였어서 자연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그렇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은 도연이 지렁이에게 은혜 혹은 죄를 갚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반들반들하고 튼실한 지렁이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귀한 보석이라도 감상하듯 눈을 반짝이며 지켜본다.